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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19: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면 곧 행복한가?

96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0-02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9)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면 곧 행복한가?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균형 잡힌 해답

 

 

현대 사회는 눈부신 물질적 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루었으나, 이와 더불어 ‘즉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의 경험’이 곧 행복이라는 가치관이 널리 퍼졌다. SNS, 게임, 유튜브 등 각종 디지털 매체는 즉각적 도파민 자극과 일시적 즐거움을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음식, 여행, 소비, 오락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가운데 많은 현대인은 날마다 쉽게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행복’이라는 등식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선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정념들 가운데 특히 ‘쾌락’과 ‘고통’을 심도있게 다루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쾌락과 즐거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쾌락과 즐거움의 구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제1권(제31~34문)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단순한 감각적 향유 또는 일시적 충족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delectatio)’이 ‘선(善)’을 획득하고 소유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정념임을 강조했다. 즉, 우리는 선을 향한 사랑과 갈망에서 시작하여, 그 선을 추구하고, 마지막에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쾌락에 도달한다.(I-II,31,1). 더 나아가 토마스는 자주 쾌락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그 활용범위가 더 좁은 ‘즐거움(Gaudium)’을 구별한다.

 

즐거움도 쾌락의 일종이지만, 무엇보다 “이성이 인식하는 선의 현존에서 오는 주체 내면의 정서적 반응”에 좀 더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동물들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 말하지 않고, 쾌락이라고 말한다.”(I-II,31,3)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다양한 감정적 형태인 즐거움, 기쁨, 용약, 유쾌함, 참행복 등으로 나타난다. 즉, 육체적(감각적) 쾌락과 정신적(지성적) 쾌락 모두를 포함한다. 정신적 쾌락은 지식, 우정, 신적 관상 등에서 오는 쾌락으로, 영적 성장과 연결되는 쾌락이다. 

 

그런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차이에 따라 강도, 가치, 도덕적 평가가 달라진다. 육체적 쾌락은 육체의 변화를 수반하며 더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정신적 쾌락이 차원의 깊이와 지속성에서 더 탁월하다.(I-II,31,5) 육체적 쾌락 중에서는 촉각(Tactus)의 쾌락이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장 강렬하지만, 시각(Visus)의 쾌락은 인식적 쾌락과 결합되어 더 고상하다.(I-II,31,6) 토마스는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쾌락들, 즉 건강한 본성에 따르는 것이 자연적 쾌락이지만, 오류에서 비롯된 비자연적 쾌락, 곧 자연에 어긋나는 쾌락도 있다고 강조한다.(I-II,31,7)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제가 사라지고 과도한 쾌락 추구가 목표가 되어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때, 행복은 오히려 멀어진다는 점을 경고한다. 에덴 동산과 쾌락으로 가득한 세상, 그리고 지옥을 묘사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 위키미디어

 

 

쾌락의 원인과 결과

 

쾌락은 선의 인식과 획득에서 유래하지만, 변화와 다양성, 기억과 희망, 사랑, 경탄까지도 쾌락의 원인이 된다. 토마스는 특히 친구에게 베푸는 행위, 선행과 같은 다른 사람의 선 역시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고 밝힘으로써 개인적인 쾌락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강조한다.(I-II,32,5&6).

 

인간은 갈망하는 선을 즉각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차츰 획득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쾌락은 “정신과 마음을 확장”시키고 활동을 완성하게 하며, 새롭고 더 큰 쾌락과 목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I-II,33,1&2) 특히 정신적 쾌락은 이성의 작용을 더욱 활발하게 한다. 쾌락은 그것을 낳는 행위를 더욱 기대하게 하고, 건강한 도덕적 활동의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I-II,33,4)  

 

 

쾌락을 넘어 행복에 도달하기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본연의 선에서 비롯되고, 일정한 윤리적 질서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토마스는 극단적 금욕주의도, 무분별한 쾌락주의도 경계했다. 스토아학파처럼 감각적 쾌락 자체를 모두 부정하면 인간 본성과의 조화를 깨트리고 오히려 무감각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자연적 질서에 맞는 쾌락의 향유는 필요하다고 봤다.

 

자연은 쾌락을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기능들에 연결시켰다. … 따라서, 만일 누군가 자연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소홀히 할 정도로 이런 쾌락들을 삼간다면, 그렇게 자연적 질서를 위반하는 가운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II-II,142,1)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쾌락 그 자체를 목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거슬러 토마스는 절제가 사라지고 과도한 쾌락 추구가 목표가 되어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때, 행복은 오히려 멀어진다는 점을 경고한다. 쾌락이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만 선한 경우도 있고 또 보기에는 선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4,2) 더욱이 과도한 육체적 쾌락은 이성의 기능을 저해한다.(I-II,33,3)

 

실제로 현대 사회에 만연한 반복적인 감각 자극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내성을 높이고, 더욱 강한 자극, 더 짜릿한 경험을 찾아 헤매게 만든다. 그러나 만족은 순간적일 뿐, 남는 것은 더 큰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욕구의 반복적 악순환이다. 알코올, 도박, 게임, 쇼핑 등 쾌락적 욕구가 제어되지 않을 때 ‘중독’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자극, 강한 소비, 넘치는 경험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평범한 일상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런 인간의 욕구에 따라 끝없는 소비와 유혹을 제공하며, 결국 대중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불행함을 호소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에 이르기 위해 쾌락들을 삼가는 것은 때때로 찬사받을 만하며 필수적이다.”(II-II,142,1) 토마스는 쾌락 자체를 일률적으로 죄악시할 필요는 없으나, “이성에 일치될 때만” 선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절제(Temperantia), 자기조절, 선한 욕구로의 전환과 같은 덕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암묵적 믿음은 현대사회에서 삶의 공허, 중독, 공동체의 해체, 도덕적·인격적 위기 등 심각한 문제로 연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같은 흐름에 균형 잡힌 해답을 제시한다. 쾌락과 즐거움은 선한 삶, 자기 성찰,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 이성의 지배 아래서만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은 덕을 통해 절제되고, 고귀한 목적‧공동체의 선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인간다운 즐거움으로 승화할 수 있다. 토마스의 성찰과 함께 외적 쾌락보다 정신적 즐거움, 자기실현과 공동체 가치, 이성적 삶과 고귀한 가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본질임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28일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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