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17-18: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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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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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17)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 (상)
“전쟁이 남긴 가난 속에서도 환대하던 신자들 모습 잊을 수 없어”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호세 마리아 비안코)는 수련기 시절 “다른 나라에 선교 가고 싶은 사람은 편지에 그 뜻을 담아 부모님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수련장 신부의 말에 편지를 쓰지만, 왕 신부의 아버지가 왕 신부는 멀리까지 가서 소임할 훌륭한 사람은 못 된다면서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왕 신부는 겨우 서명을 받아 일본과 한국에 차례로 파견됐다. 고향 스페인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74년째 본의 아니게(?)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왕 신부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들어본다.
- 왕요셉 신부는 유년기 시절, 학교 운동장 옆 성당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부분을 묵상하며 성소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박효주 기자
살레시오회 학교에서 꽃 핀 성소
193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왕요셉 신부는 10살부터 15살 때까지 마드리드에 있는 살레시오회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사순 시기 피정을 3일씩 했다. 그 기간엔 교과서를 안 가지고 다녔기에 왕 신부는 대신 교실에 있던 책들 중 한 권을 읽었다. 왕 신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관한 성인전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온전히 다가왔다”고 소회했다. 책에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그의 모든 꿈을 이룬 후 결국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책은 마침내 두 성인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고 증언하기 위해 예수회를 창립하게 된 이야기를 다뤘다.
“그날 이후 제 성소를 두고 기도했어요. 학교 운동장 옆 성당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또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신 것을 묵상하며 저에 대한 부르심을 느꼈죠.”
왕 신부는 자신이 직접 그린 수준급 그림을 보여줬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시는 장면이었다. 왕 신부는 감명을 받았던 그 광경을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주위 어른들의 말에 순명하겠다고 결심한 왕 신부에게 어른들은 새로 시작하는 가을 학기부터 수도회에서 지원자로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3년 후 18세에 입회해서 수련기 1년을 보낸 뒤 청빈·정결·순명 서원을 하면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그 말씀을 천천히 따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 왕요셉 신부가 예수님께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신 장면이라며 직접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박효주 기자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다
왕 신부의 인생에서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왕 신부와 살레시오회의 만남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왕 신부의 아버지가 집에 살레시오회 관구장 신부를 숨겨주면서 시작됐다. 왕 신부 아버지는 그때로선 큰 건물인 5층 건물의 경비였는데 전쟁의 한 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해 건물로 도망 온 신부에게 도움을 줬다. 그것이 인연이 돼 왕 신부는 살레시오회 학교를 다니게 됐고 입회까지 이어졌다. 10대 초반에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이었기에 전투기가 신문에 자주 나오는 걸 보고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왕 신부는 1949년 첫 서원을 한 뒤 다음 해에 전후(戰後)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일본으로 선교를 갔다. 수련기 때 63명의 수련자 중 절반이 선교사로 떠났는데 그중 네 명이 일본으로 파견된 것이다.
- 왕요셉 신부는 “일본 선교사로 호명되자 너무 놀랍고 두렵기도 해서 하느님께 울면서 기도했다”고 말했다. 박효주 기자
“일본 선교사로 제가 호명되자 너무 놀랍고 두렵기도 해서 그날 성당 가서 하느님께 ‘너무 기쁘지만 자신이 없으니 도와달라’며 울면서 기도했어요.”
일본의 상황은 심각했다. 고아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녔고 집도 거의 무너져있었다. 살레시오회는 남학생들만 300~400명 정도 되는 고아원 대여섯 개를 운영했다. 수도회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공부와 재봉·목공·농사 등의 기술을 가르쳤다.
왕 신부는 일본에 12년간 있으며 1959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2년 살레시오회에서 맡고 있던 한국의 서울 도림동본당으로 2년간 파견됐다. 공교롭게도 한국 또한 6·25전쟁을 치른 지 몇 년 안 된 때였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라 동네는 가난했기에 본당에서는 미군들이 가져온 옥수수 가루 등을 배급했다. 가난 속에서도 새로운 신부님이 왔다며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던 신자들을 왕 신부는 잊을 수 없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막 시작될 무렵이라 아직 라틴어로 미사가 봉헌되고 성사가 행해지던 때였다. 덕분에 왕 신부는 한국에 오자마자 언어를 몰라도 사목을 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신자들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로 한국어를 가르쳐줬고, 왕 신부는 혼자 성당 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 교리 문답 책을 읽으며 한국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발전이라는 무기, 선하게 다뤄야”
옛날에 비해 한국은 물질적으로 큰 발전을 했다. 그중에서도 디지털 혁명이 놀랍다. 컴퓨터 등 전자기기의 이용은 편리하고 여러 작업에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여러 유혹이 되고 안 좋은 일의 도구로도 쓰이기에 조심해야 한다. 세상이 발전하고 발달할수록 선함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왕 신부가 보기에 요즘은 특별히 어려운 시기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왕 신부는 영성체와 성체조배를 추천했다. 또한 신자들이 주일에 미사를 드리고 서로 기쁨 속에 친교를 나누며 신앙을 실천하길 희망하며 덧붙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앙을 길러가면 좋겠어요.”
- (왼쪽)1962년 8월 15일 서울 도림동본당에서 사목하던 왕요셉 신부(가운데)가 아이들과 연을 날리고 있다. (오른쪽)1963년 8월 13일 구로동공소에서 왕요셉 신부(앞줄 가운데 왼쪽)가 영세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왕요셉 신부 제공
[가톨릭신문, 2024년 12월 15일, 박효주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18)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 (하)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신앙 하모니, 주님 은총으로 퍼져 나가길”
아흔이 훌쩍 넘은 왕요셉 신부(호세 마리아 비안코·살레시오회)는 나이가 들며 치과도 다녀야 하고 행동도 느려졌으며, 혈압과 신경계 문제도 생겨 여행을 안 좋아하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맑은 눈빛과 정정한 기운으로 한가득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에 왕 신부의 고령은 실감할 수 없었다. 선교사로만 74년을 살며 청소년들과 함께한 시간만큼 그들을 닮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왕 신부의 두 번째 이야기를 들어본다.
- 왕요셉 신부는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자비를 베푸실 거예요. 모두 힘냅시다”라며 희망을 보였다. 박효주 기자
밀어주고 끌어주며 청소년과 동고동락
살레시오회는 1954년 한국에 진출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성 요한 보스코(1815~1888)가 창립한 살레시오회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도우며 착한 그리스도인, 정직한 시민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한다. 살레시오회의 정신에 따라 왕 신부도 청소년들 사목에 힘썼다. 한국에 온 왕 신부는 1964년 4월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수련자 대상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1971년 3월 중학생들에게 도덕 과목을 가르쳤다. 그 사이 1966년에는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 설립에 참여했다.
“우리는 일생을 젊은이들 가운데 살아왔어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잘 따라가야 되고 동시에 젊은이들을 잘 이끌어야 하죠.”
왕 신부는 “청소년기는 생명력이 한창일 때이기에 활발하고 기쁨도 넘치는 때”라며 “그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운동장에서 운동도 하고 시합도 하며 많은 교육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왕 신부는 기숙사 자유시간을 학생들과 어떻게 재미있게 보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방법이 연극이나 성가 연습, 악단이었다. 당시엔 TV가 없었기에 일요일 오후 저녁이면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성인전 내용으로 꾸민 각본으로 연극을 만든 것이다.
“악기들의 하모니는 모두에게 기쁨이 돼요. 악기마다 서로 다른 음을 내며 하모니가 맞춰질 때 완성된 음악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요.”
학교에서 학생들과 악단도 꾸렸다. 일본 고아원에 있을 때도 악단은 늘 있었을 정도로 음악이 모두의 정서적 발달과 화합에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다. 왕 신부도 악기를 다룬다. 바로 트럼펫이다. 인터뷰 현장에 악기를 지니고 온 왕 신부는 트럼펫을 불어달라는 요청에 흔쾌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의 성가를 연주했다.
기숙사뿐 아니라 학교 성당에서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활동도 있었다.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예식을 위해 열심히 성가도 부르고 합동 성가대도 들고 재단 옆에서 복사도 서면서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
“요즘은 휴대폰 때문에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함께 모여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더 깊은 친교를 나눌 수 있었죠.”
- 왕요셉 신부는 “악기들의 하모니는 모두에게 기쁨이 된다”며 지니고 온 트럼펫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성가 연주를 선보였다. 박효주 기자
어지러운 세상, 예수님께 순명하며 기도해야
“선교사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 필요성을 따지기 이전에요.”
왕 신부는 ‘온 세상은 한 가정’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교통·통신의 발달로 세상이 좁아져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서로 친구가 되거나 세계 곳곳에 여행을 하기 쉬워졌다. 그런데 선교사는 이동이 불편했던 옛날부터 세상에 교리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됐다. 가고 싶은 곳으로 파견되는 것도 아닌, 낯선 곳도 관구장의 뜻에 순명해 떠난다. 신앙과 사명 하나로 말이다. 왕 신부는 이것이 2000년 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살레시오회는 중국, 몽골, 캄보디아, 아프리카, 파프아뉴기니 등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다.
“지금은 어려운 시기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아주 모범적인 사람 돼야 부하 직원들을 잘 지도할 수 있어요. 하느님을 인정하고 국가 통치도 잘해야 하죠.”
요즘엔 하루 중 성당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는 왕 신부는 특히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 등 국가 간의 전쟁과 북한 파병도 문제다. 왕 신부는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특별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날을 꿈꾼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의 정성 어린 기도와 속죄가 먼저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불쌍한 인류를 도와주시길 바라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자비를 베푸실 거예요. 모두 힘냅시다.”
- 2009년 3월 19일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회관 성당에서 열린 왕요셉 신부(가운데)의 50주년 금경축 미사 후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2024년 12월 25일,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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