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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24: 만리장성을 넘다

172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7-23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4) 만리장성을 넘다


북경으로 오는 조선 교우 만나기 위해 만리장성 넘어 서만자로

 

 

대주 성문은 태원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첫 관문이다. 산서에서 만리장성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대주 성문을 지나야 했기에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이 성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기현 출발 일주일 만에 만리장성 남쪽 도착

 

1834년 9월 17일 왕 요셉을 북경으로 급하게 보냈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음력 9월에 북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입니다. 저 역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 9월 22일 서둘러 서만자로 떠났습니다. 그곳은 북경에서 가깝고, 제가 조선 교우들을 만나기 훨씬 수월한 곳입니다.

 

산서대목구장 살베티 주교·알폰소 신부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살베티 주교는 내게 주려고 상당한 금액을 꾸어 보려고 했습니다. 저는 주교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가중시킬까 봐 걱정돼 살베티 주교에게 “긴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그때 주교님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살베티 주교는 제게 훌륭한 길 안내인을 붙여줬습니다. 덕분에 서만자로 가는 여정은 이전보다 훨씬 즐겁고 수월했습니다.(필자 주- 브뤼기에르 주교의 산서대목구에서 서만자까지의 여정은 그의 여행기나 서한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로 갔다는 내용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 여정을 살펴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앵베르 주교는 서한에서 “산서에서 서만자까지 갔다가 이후 갑사의 명의 주교(브뤼기에르 주교)와 그 밖의 동료(모방)가 다닌 무인지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보다 더 수월하고 덜 추운 달단만(요동만) 해변을 따라가는 국도로 갔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앵베르 주교가 1837년 12월 8일 자로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브뤼기에르와 앵베르 주교는 적어도 산서대목구청에서 서만자까지 같은 길을 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글은 앵베르 주교의 여정을 기초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여정을 재조명한 내용이다.)

 

산서대목구청이 자리한 기현(祁縣)에서 출발해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부(太源府)로 갔습니다. 이곳을 통과해야만 만리장성으로 가는 관문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현에서 태원부까지 하루 반나절 길입니다. 태원은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76) 때부터 형성된 고도입니다. 진(晋)의 땅이었던 태원은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했다가 명ㆍ청 이후 산서성 성도로 자리해 오고 있었습니다.

 

태원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통행세를 내야 합니다. 저와 길 안내인은 태원의 서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로질러 북경으로 가는 성문을 빠져나간 후 대동부(大同府)로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 길로 5일을 쉼 없이 가야만 만리장성의 남쪽 성벽에 다다릅니다.

 

우리는 1834년 9월 22일 산서대목구청을 떠나 일주일 만인 9월 29일 만리장성의 외벽에 도착했습니다.(필자 주-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은 앵베르 주교의 여행 일정과 딱 들어맞는다. 앵베르 주교 역시 산서대목구청에서 태원까지 하루 반나절, 태원에서 만리장성 남쪽 성벽까지 닷새가 걸렸다.)

 

제법 높았지만, 사람들이 제게 겁을 준 위험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산을 하나 오른 다음 만리장성 외벽을 만났습니다. 여러 곳에 구멍이 나고 무너져 있지만,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벽돌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몇 개의 초소가 있습니다. 초소는 밀수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여행자들의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 세워졌다고들 말합니다. 저의 길 안내인도 초소를 지키는 관원들과 가벼운 언쟁을 벌였습니다. 길 안내인은 충분히 돈을 주지 않으려 하고, 관원들은 지나치게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타협점을 찾았고 저는 무사히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돈 앞에서 서양인인 저의 존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 안문관은 대상들의 무역로였다. 바위에 난 수레바퀴 자국이 얼마나 많은 교역이 이뤄졌는지를 보여준다.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안문관을 지키는 관원들에게 통행세 형식의 뇌물을 쥐여주고 아무 탈 없이 통과했다.

 

 

대주 관문 관원들에게 돈 주고 통행증 구해

 

만리장성 남쪽 성벽 입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대주(代州)입니다. 만리장성을 통과하려면 이곳에서 관문 통행증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대주의 주막에서 관문 관원들에게 돈을 주고 통행증을 구했습니다. 대주에서 만리장성 남쪽 산기슭에 있는 안문관(雁門關)과 산 정상, 그리고 성벽 북쪽 산 밑에 있는 광무(廣武) 등 세 관문을 거쳐야만 대동부(大同府)로 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만난 만리장성 관문은 바로 안문관이었습니다. ‘기러기가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의 안문관은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해발 1700m의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 고대 춘추시대 때 북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어진 이곳은 “안문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안문을 잃으면 중원을 잃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최후의 방위선이자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하고, 고비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관문인 가욕관을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 부르며, 안문관을 ‘중화제일관’(中華第一關)이라 합니다. 안문관은 또한 서역 대상의 주요 교통로였습니다. 대상들의 무거운 짐수레가 바위를 닳게 해 바퀴 길을 낼 정도로 왕래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짐수레의 크기와 수에 따라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챙겼습니다.

 

만리장성은 평야지대, 그리고 산맥들 사이의 협곡들에서 성벽의 높이가 10~12m로 방어용 보루를 갖춘 큰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산맥 위로 올라가면 이 성벽의 높이가 3m나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산맥 위의 성벽은 각면보루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은 언덕들과 아주 가까운 구릉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방 신부는 다른 문 한 곳으로 만리장성을 통과했고, 왕 요셉도 2개의 각기 다른 문으로 북경을 드나들었습니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남쪽 산비탈은 청나라에 속하고, 북쪽의 것은 달단에 속합니다. 이 북쪽 관문이 있는 도시가 ‘장가구(張家口)’입니다. 저 역시 장가구를 통과해 서만자로 갈 예정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에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안문관을 무사히 빠져나온 우리는 왜웨라는 하급 관리가 지키는 산꼭대기 관문을 지나 마지막 관문인 ‘광무(廣武)’로 향했습니다. 안문관에서 광무까지 만리장성은 토성입니다. 이 토성은 무너지고 여기저기 끊어져 있습니다. 광무는 산서성 산양현 남쪽 40㎞ 지점에 있습니다. 이곳은 한나라 당시 흉노와 동이가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던 지역입니다. 고조선과 흉노가 다투다가 한 무제가 이곳을 점령했고, 고구려가 강해지면서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나중에 발해, 요에 넘어간 곳입니다.

 

- 안문관을 통과한 후 광무까지의 만리장성은 주로 토성으로 이뤄져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 길을 걸어갈 때에도 토성 곳곳이 무너지고 끊겨 있었다.

 

 

대동에서 방앗간 운영 왕푸의 집에 머물러

 

광무 고성은 돌로 쌓은 입구 벽을 보면 마치 명나라 시대 옹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구려성’입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雉)’가 군데군데 확연하게 설치돼 있습니다. 치는 성벽 일부를 앞으로 나오게 쌓아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과 좌우 측면에서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입니다. 한족들은 성문을 일(一)자 형태로 만들지, 절대로 휘어지게 쌓지 않습니다.(필자 주-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를 보면 정작 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한 우리 민족의 삶 터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다만 만리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진나라 시황제를 비롯한 중국 연대기만 장황하게 적고 있다. “그들의 제국이 설립된 것은 약 4000년, 다시 말해 70인역 성경의 연대기를 채택한다면 대홍수 훨씬 이전으로 그리고 히브리어 텍스트와 불가타 성경의 연대기를 따른다면 노아가 신아르 평야로 내려간 얼마 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식으로.)

 

광무를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관리들에게 대주에서 받았던 만리장성 통행증을 반환했습니다. 그리고 광무 고성에서 약 8㎞ 떨어진 곳까지 더 가서 숙박했습니다. 광무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신분을 들킬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일을 더 걸어 산서성의 마지막 관문인 ‘대동(大同)’에 도착했습니다.

 

대동은 선비족인 북위(386~534)가 처음 도읍을 정했던 고도(古都)입니다. 이곳은 돈황 막고굴·낙양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는 ‘운강석굴’로 유명한 곳입니다. 운강석굴은 약 1㎞에 달하는 사암층 40여 개 동굴에 5만여 개의 불상이 조각돼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대동은 정사각형의 성채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입니다. 우리는 대동 동문(東門)인 ‘화양문(和陽門)’으로 들어가 방앗간을 운영하는 왕푸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필자 주-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3년 늦게 같은 길을 간 앵베르 주교는 대동 왕푸의 집에 머물렀다. 일반적으로 박해시대 때 선교사들의 길 안내인들은 발각되지 않는 이상 고정된 비밀 루트와 신변이 보장된 특정 교우 집에 머문다. 앵베르 주교는 이 길을 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반드시 왕푸를 만나도록 권고했다. 앵베르 주교는 “왕푸는 훌륭한 교리교사이고 그의 가족들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추천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대동에서 이 집에 머물렀음이 분명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7월 21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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