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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9월 8일 (일)연중 제23주일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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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짧은 2년이지만 큰 주춧돌로 마산교구에 놓인 김수환 스테파노 초대 교구장

171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7-14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짧은 2년이지만 큰 주춧돌로 마산교구에 놓인 김수환 스테파노 초대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대구 군위에 위치한 사랑과 나눔 공원은 ‘바보’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우리 시대의 빛과 소금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이다. 나눔 공원 뜰에 놓인 단아한 옹기들에는 ‘빚다’ ‘질박하다’ ‘견디다’ ‘품다’ ‘비우다’ ‘숨 쉬다’라는 글들이 쓰여 있어, 그대로 추기경의 생과 성품을 느끼게 한다.

 

본관 앞 바보 나무에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란 유언의 글이 눈길을 끈다. 본관에 들어서서 ‘따뜻하게 안아주는 추기경’ 동상을 만나고, 전시된 유품들에서 추모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된다. 스테파노기념성당을 지나서 걷다 보면 테마공원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서 생가와 옹기가마도 볼 수 있다. 생가 곁으로 설치된 큰 십자가 형상의 나무계단을 딛고 오르면 그분 삶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다. 몇 걸음 올라서면 “19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 주교”라는 표식을 맞닥뜨리게 되어 반갑고 설렌다.

 

 

김수환 주교 서품과 착좌식

 

마산교구는 1966년 2월 15일 부산교구에서 분리되어 열두 번째 교구로 설정되었다. 임명된 초대 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의 착좌식이 5월 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물론 기관장이나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7천 명 인파 속에서 행사가 거행되었다. 주교서품미사는 주한 교황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의 주례로 봉헌되었다.

 

서품식 입장 행렬모습(1966년 5월 31일)

 

 

김수환 주교는 경축식 답사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쇄신정신과 사목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임을 밝혔다.

 

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음력 윤 5월 8일) 대구 남산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4살 때 군위군으로 이사했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자, 모친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웠다. 11살 때 형 김동한 가롤로와 함께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를 졸업하고 1941년 3월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4월 도쿄조치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다가 해방 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하였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본당 사목과 교구 행정을 담당하다 1956년 서독 뮌스터대학에서 유학하며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시보 사장을 맡았다. 

 


마산교구장 사목활동

 

김수환 주교는 새 교구의 기본틀을 만들어 나가는 데 주력하며, 사무행정업무 전체를 맡을 부교구장에 김재석 요셉 신부를 임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협의회를 결성하고 사제평의회를 조직했다. 본당 사목방문을 계획하여 직접 신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사목자가 되고 싶어 했다. 평신도도 신부·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의회의 기본 정신을 인식시키고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조금씩 일깨우게 했다.

 

상남동본당 성전 봉헌식(1968년 5월 11일)

 

 

마산교구 설정 직전에 본당으로 설립된 산청, 하동, 의령성당 건축이 완공되었다. 1966년 9월에 산청성당과 하동성당, 11월에는 의령성당 봉헌식이 김수환 주교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교구설정 후 처음으로 1966년 12월 28일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순교성인을 주보로 한 상남동본당을 설립했다.

 

1967년에는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 달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1968년에는 전례위원회, 교리위원회 같은 교구조직을 보완하여 교구가 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했다. 4월 7일에는 경화동성당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주례하고, 5월 11일에 완공한 상남동성당 봉헌식을 집전했다. 

 

 

아쉬움 속 떠남은 더 큰 발자취로

 

마산교구 설립과 함께한 김수환 주교는 뜻하지 않게, 1968년 4월 27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주교 자신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할 만큼 충격이었지만, 겨우 2년 만에 이별을 맞은 교구 신자들의 놀라움과 실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5월 말 아쉬움 속에 떠나는 김수환 대주교는 “우리 마산교구민 전체가 참으로 주님 안에 하나가 되도록 기구하고 드디어는 한국교회 전체가 참으로 구원의 일치의 성사가 되게끔 우리 모두 형제적 사랑에 살자.”고 당부했다.

 

바로 이듬해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며, 47세 나이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1975년 6월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통일에 대비하고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1984년 5월에는 한국천주교회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개최했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주례했다.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많은 결실을 맺었다.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2009년 2월 16일 86세로 서울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여, 유해는 경기도 용인천주교공원묘원 성직자묘역에 모셨다. 

 

▶ 참고 : <천주교 마산교구 40년사> <완월동성당 120년사> 대구대교구·서울대교구 홈페이지, 김수환 추기경 기타 자료

 

[2024년 7월 14일(나해)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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