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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5-6: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오기백 신부

136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6-11

[저를 보내주십시오] (5)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오기백 신부 (상)


노동자 · 빈민 위해 지켜온 ‘현장교회’…"치열한 삶 속에서 주님 만났죠"

 

 

980년대, 기나긴 독재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던 한국 사회에 또 다른 독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인권이 무시되고 정부에 대한 하소연마저 감시당하던 독재 시기의 한가운데서, 고통에 울부짖던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 몸 바쳐 일한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아일랜드 출신의 오기백(Daniel O’Keeffe·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73) 신부를 소개한다.

 

 

겨울이 매서웠던 한국 그리고 첫 소임지 흑산도

 

1976년 2월, 오 신부가 첫발을 디딘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아일랜드에서 몇 날 몇 시 한국 공항에 도착할 거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그 전보마저도 오래 걸려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막막하던 순간도 잠시, 사람들이 그를 운 좋게 미군으로 착각한 덕에 주한미군용 택시를 얻어 탔다. 극동의 춥고 낯선 나라에서의 첫 경험이었다.

 

오 신부가 골롬반회에 입회한 건 사실 남아메리카, 특히 칠레로 선교 가고 싶어서였다. 그는 “입회 전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특히 골롬반회는 남아메리카에 주로 선교사를 파견해서 나에게는 골롬반회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제가 부제품 받던 즈음엔 남아메리카 교회가 너무나 불안정한 나머지 경험 없는 젊은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어요. 제 꿈이 날아가 버렸다고 느꼈어요. 그 와중에 아시아 끝자락의 ‘한국’으로 파견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친한 선배 선교사 몇이 한국에 있어 싫지만은 않았다. 1년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스물세 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들어온 지 5개월 만에 전남 흑산도로 발령받았다. 오 신부는 “한국어를 아직 잘 못 해 처음엔 선교보다는 문화와 언어를 익히는 데 집중했다”고 회상했다.

 

젊었던 그는 또래 한국 청년들과 어울리며 한국 문화를 점차 체득했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 첫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오 신부는 “일부러 신자들이 많이 안 오도록 궂은 날씨를 골라 첫 한국어 미사를 했다”며 웃었다. 주임 신부와 아주머니 셋이 참례했는데, 미사 중 한 아주머니가 그의 어눌한 한국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 신부는 너무 부끄러워 제대 앞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그는 “겨울인데도 너무 긴장한 탓에 땀이 줄줄 흘렀다”고 회상했다.

 

생활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아일랜드 고향도 바닷가라 흑산도는 익숙하고 편했다. 오히려 고향보다 중학교 시설이 좋아 놀라기도 했다.

 

- 1978년 한국 대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오기백 신부(오른쪽).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독재정권 중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다

 

오 신부가 1977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할 때는 노동문제가 한창 불거졌다. 그는 “고(故) 양노엘 신부님이 본국에 잠시 가 있는 동안 세 달간 노동자들과의 미사를 대신 주례했는데, 이때 한국의 노동현실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또 1978년 인천 동일방직공장사건, 1979년 부·마 민주항쟁같이 굵직한 사건들은 그에게 충격을 줬다.

 

그 후 노동사목에 참여하게 된 오 신부는 부천에 있는 인천교구 삼정동성당에 거주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 마련을 꾀했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인천교구와 함께 부천에 집을 마련했다. 노동 현장 경험이 많은 활동가도 구해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이었다.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집의 1층은 열어둬 때로는 그저 잠을 자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이 그 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감시했다. 오 신부는 “당시 근처 심곡동본당 주임 신부님이었던 고(故) 최기산(보니파시오) 주교님과 함께 지역 경찰서장을 직접 찾아가니 우리가 노동자들을 동요케 한다며 말 한마디면 나를 한국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겁을 줬다”고 회상했다.

 

“집에 노동자들이 들락날락하니 경찰이 집 앞에 검문소를 설치해 모든 사람을 검문했습니다. 우리를 빨갱이라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조성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인천교구장이셨던 나길모 주교님이 직접 오셔서 지역 신자들에게 노동사목이 무엇인지 설명하시며 안심시키셨습니다.”

 

- 오기백 신부가 서울 봉천9동(현 서울 은천동) 빈민사목 시절 불도저 철거현장에서 시위하고 있다.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빈민의 권리를 위하여

 

오기백 신부는 1992년 골롬반회 도시빈민사목의 거점이 있는 서울 봉천9동(현 서울 은천동) 달동네로 소임을 받았다. 주택 소유주와 세입자 간의 갈등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사회문제였다. 오 신부는 “서울시의 민간 재개발은 철저하게 건축주와 주택 소유권자의 이익만을 위했다”며 “우리 역할은 쫓겨날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동반해 주는 거였다”고 말했다.

 

오 신부는 ‘현장’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골롬반회 선교, 특히 빈민사목에 있어서 현장교회의 특징을 강조했다. 그는 “일반 본당은 전례 생활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 현장교회는 삶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신자라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고민하고, 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더 인간답게 더불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오 신부는 “세입자들에게 재개발의 개념과 과정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그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왔다”며 “또 봉천9동 세입자들이 다른 재개발지역 세입자들과 연대모임을 만들어 서로 경험을 나누고 조언하도록 연결해 줬다”고 말했다.

 

- 1987년 오기백 신부가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3주년 기념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오기백 신부가 본 한국의 노동자 · 빈민

 

오 신부는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은 노동자”라며 “주인공인 노동자들이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천에서 노동사목에 투신할 당시, 노동자 중에는 중학교마저도 졸업하지 못한 열다섯, 열여섯 살의 청소년들도 많았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마음 한켠에 열등감을 가진 이도 꽤 됐다. 서울 봉천9동 달동네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 신부는 “달동네 신자들은 근처 신림사거리에 있는 크고 웅장한 성당 분위기에 압도돼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자기의 고된 삶과 괴리감을 느껴 스스로 소외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오 신부는 도시빈민사목을 끝으로 한국 지부장에 선출돼 현장을 떠났다. 오랜 인연들과 조금 멀어질 생각에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부장도 하느님의 뜻이자 노동자와 한국 사회를 위해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이제는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느꼈지요. 현장사목에서 사제는 원래 잠깐 있다가 떠나는 존재입니다. 노동자·빈민을 위한 사목은 누가 가든 지속될 거라 믿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지요.”

 

인터뷰 영상 : https://youtu.be/C2xJcs42T6w?si=pNwlrJnJBef99u06

 

[가톨릭신문, 2024년 6월 9일, 이형준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6)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오기백 신부 (하)


“다양성 함께 나누고 정의 위해 목소리 내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오기백 신부(Daniel O‘Keeffe·74·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낯선 한국 땅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산 지 49년째. 그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법무부에서 ‘대한민국 올해의 이민자 상’을 받았다. 그가 선교사로 있는 동안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다양성을 위해 선교는 계속돼야 한다는 오 신부. 영성과 선교에 대한 오 신부의 생각을 들어봤다.

 

 

신앙과 문화의 대화

 

1976년 한국에 온 오기백 신부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2년간 아일랜드로 돌아가 실용 신학을 공부했다. 그때 쓴 논문 제목은 ‘신앙과 문화의 대화’였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신앙도 있지만 샤머니즘, 유교, 불교가 모두 문화적 요소로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문화 속에서 에너지를 받더라고요.”

 

칠월 칠석날 큰 스님이 노동자들을 초청해서 밥도 먹이고 노래도 함께 불러주면 노동자들이 다시 일어설 힘을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게 신앙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이걸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자원으로 쓸 수 있을까’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죠.”

 

사제를 그만둔 동생을 통해 다양성을 받아들이다

 

아일랜드에 갔을 때 가족도 만났다. 여동생 넷은 모두 결혼해 조카가 많았다. 남동생은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같은 골롬반회 신부였는데 서품받고 10년째 되던 해에 사제생활을 접었다. 그 이유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고.

 

“동생의 파트너를 처음 만났을 때 머리로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둘이 결혼해서 지금 30년째 너무 잘살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느님께서 이 기회를 통해 나에게 새로운 걸 보여주셨구나 싶었어요.”

 

둘의 결혼식장에서 오 신부는 느꼈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좋지 않은가?’ “교황님 말씀대로 누가 누구를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어요. 정원에도 똑같은 꽃, 똑같은 나무가 하나도 없어요. 사람도 같다고 생각해요.”

 

- 오기백 신부(왼쪽)가 2021년 ‘대한민국 올해의 이민자상’을 수상하고 있다. 법무부 제공

 

 

선교사들의 영성 강화 프로그램 시작

 

오 신부는 1998년에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한국 지부장이 됐다. 2000년을 앞두고 선교사 시스템 변화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골롬반회는 선교회라서 선교에 대해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이 많이 있었다. 준비 없이 파견된 선교사들을 보거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제대로 준비를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데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선교사들을 위한 사전 교육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1999년 한 달짜리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시작했지요.” 1984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앞으로는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견하는 교회가 되라고 초대하신 그 뜻을 이은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배우는 사회 정의

 

오 신부는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사회 정의를 설명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가 다 형제들이니까 형제처럼 살아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부분은 땅에서 올바른 사회를 위해 아주 구체적으로 노력을 해야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 노력을 안 할 거면 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거죠? 물론 인간이니까 모순이 없을 수는 없지만 모순을 축소 시켜 나가야죠.”

 

하지만 세계적으로 그 모순이 너무도 심하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한쪽에서는 굶고 있다. “이것을 묵인한다면 우리가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 2013년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80주년 기념 미사’에서 당시 선교회 한국 지부장이었던 오기백 신부(앞줄 맨 왼쪽)가 미사를 공동집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선교는 다양한 복음화 위해 계속 필요

 

예전의 선교는 교회가 없는 곳을 가서 교회를 세우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본당이 없는 데도 드물고 세계적으로도 가톨릭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도 거의 없다. “지금의 선교 개념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닌 나눔을 하는 것이에요.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다양성을 나누어야 해요.”

 

문화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보고 느끼는 게 다 다르다. 모든 지역교회는 하느님에 대해 역사와 경험에 따른 자기 통찰이 있다. “어떤 분들은 이제 한국교회는 튼튼하니까 선교사들이 필요 없다는 말도 해요. 하지만 선교사는 우물 안의 개구리를 타파하는 역할을 해요.”

 

지금의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들과 조화롭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미얀마 같은 경우는 종교끼리 폐쇄적이기에, 한국교회의 선교사가 가면 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을 나눌 수 있다고 오 신부는 생각한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여러 전쟁과 엮인 나라이기 때문에 평화 운동이 많이 발전했다. 그래서 한국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있으면 미국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지지한다.

 

또 한국은 지금 무기 수출이 세계 7위인데 현 대통령은 본인 임기 안에서 4위가 되도록 하겠다며 미국에 무기를 많이 보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평화의 날’마다 메시지를 통해 무기 생산과 수출을 비판하지만, 오 신부가 볼 때 한국교회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는 이럴 때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자신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깊이 믿는다는 오 신부. 선교사로서 어려운 여정을 이어 왔지만 현재 행복하다고 전했다.

 

“여러분에게 선교사의 삶에 도전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참 보람 있는 생활입니다.”

 

인터뷰 영상 : https://youtu.be/lc69HzAt10Q?si=FMt6w6arSuxTP5RH

 

[가톨릭신문, 2024년 6월 16일,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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