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12-13: 정적주의(靜寂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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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02 ㅣ No.1059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2) 정적주의(靜寂主義) (상)


성스러운 고요 속 자신의 존재조차 잊으려한 수도자들

 

 

 

- [작품3] 주두성자(柱頭聖者) 성 시메온 (389~459): 그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을 피하고자 기둥 위에서 고행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스(터키 남부 아다나)에서 출생하였고 그가 지낸 기둥은 모두 4개였으며 마지막 거처한 기둥은 20m 높이였다. 기둥 밑에는 그의 어머니가 기둥을 잡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순례하였고, 비잔틴 황제도 조언을 구했다고 전한다.

 

 

1. 왜 이콘은 사람의 형체를 마르게 그릴까

 

나는 인간을 자석에 흔들리는 쇳가루로 생각했습니다. 자석은 쇳가루와 화학적으로 같은 철(Fe)이고 근본적인 성분은 같은 데 모든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쇳가루는 자석에 붙어 있을 때 안정적이고, 자석에서 스스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위에 쇳가루를 놓고 밑에 자석을 둘 때에도 쇳가루는 종이를 사이에 두고 자석에 모두 들러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간에 종이가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 경우 쇳가루는 자석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쇳가루는 자석에 붙어 있음으로써 안정성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끼인 종이라는 가림막 때문에 자석에 붙어 있어도, 누가 종이를 잡아당긴다면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죄가 있는 인간을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의한 가림막 때문에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가까이할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선이시고, 나오는 빛이 아름다운 것처럼, 부활을 통해 나도 그 빛을 받아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가림막은 그 빛을 차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죄의 가림막을 치우고자, 또는 스스로 하느님과 닮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윤리, 도덕과 깨달음에 따른 행위로 그것을 이루려 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육체적인 것까지 동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됨으로써 지하 교회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며 무수한 개종자와 함께 부가 넘치게 되었고, 그 결과 교회의 세속화는 가속되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신심 깊은 신앙인들은 탈출기 때의 이스라엘, 예수님 사도 시대 때의 순교자 정신을 배우고자 이집트 사막이나 황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신앙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막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며, 시험과 정화의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동굴이나 비좁은 방에서, 때로는 묘지에서 완전한 고요와 정적(靜寂, hesychia)을 추구하며, 부단한 관상과 기도로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를 정적주의라고 합니다. 팔라마스 그레고리우스(1296~1359년)에 의하면, 그들의 목적은 하느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하느님의 빛, 즉 창조되지 않은 빛을 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타보르 산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빛과 같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빛을 내면화하는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작품1]

 

침묵과 관조의 상태에서 신과 만남을 체험하려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스러운 고요 속에서 모든 개념적 사고(思考)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내적인 평정을 이루고, 그 내적인 평정은 자기 비움 속에서 겸손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육체와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를 통해, 즉 잃어버린 하느님의 얼굴을 되찾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막은 우선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곳으로, 낮에는 무척 강렬한 태양에 의해 뜨겁고 건조합니다. 그러니 동굴 속에 들어앉아 태양이 내리쬐는 황량한 들판을 내려다보면, 황갈색의 모래와 검은 바위들만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해질 무렵의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애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밤하늘에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끝없이 밀려오는 적막함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우선 생각만으로도 나를 지치게 합니다.

 

 

- [작품1] 팔라마스 그레고리우스: 그리스 아토스 산, 성 사바스 수도원 출신, 테살로니카 대주교. 그는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그 빛을 찾아 내면화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독과 정적을 극복해낸 사막의 은둔자 성 안토니우스(251~356년)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305년경에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관상과 기도와 공동체에서 실행할 도덕적·원리적 자기 수행 규범을 가르쳤습니다. [작품2]

 

이 규범의 근본은 ‘하느님을 닮으려는 것(신화)’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비움과 낮춤을 통해서 보여준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본받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묵상(관상), 고행과 금욕, 자기절제를 실행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과 수도자들의 훌륭한 금언(金言)들이 점차 이집트에서 아토스 산으로 전해지며 10~11세기에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은 앞서 설명한 하느님의 신비(부정주의)와 일맥상통한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자기 수행을 통해 마음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사랑을 본받아 자기 비움, 겸손과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순종을 우리의 실생활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수행하는 장소에서 하느님과 만나려는 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정상적이지 못할 정도이고, 그 고행을 보며 아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잠(沈潛) 또는 고행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작품2] 성 안토니우스: 템페라, 50 x 40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그는 악마의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 겸손, 확고한 금욕과 고행의 자세 등을 두루마리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기둥 위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행하는 사람도 있고, 침묵에 걸림돌이 된다고 혓바닥이 가장 위험한 유혹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고 3년 동안 돌을 입안에 넣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보처럼 행동하여 주변 사람으로부터 천대와 무시를 당하며 수행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표현으로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코린 15,8 참조) 또는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참조)를 수행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작품3]

 

요한 세례자, 또는 스승을 본받아 생활한 이들 수도자들의 모습은 세속적인 생활을 멀리하고, 가난과 고행, 반복적인 기도를 수행함으로써 마른 형체로 변합니다. 이콘에서는 그런 모습을 그려 수도자의 맑은 영혼을 표시합니다.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며, 관조와 고행·금욕·반성하는 삶을 추구하다 보니 이콘에서는 성인들의 팔과 다리를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길게 그렸습니다. 머리와 전신 길이와의 비율이 1:9까지 길게 그려지며, 발에서 무릎까지의 길이가 전신의 1/3에 이를 정도로 의도적으로 변용하였습니다. 이콘에서는 각자 은둔 장소의 형태, 얼굴은 거친 머리카락, 마르고 긴 얼굴, 발까지 내려온 수염에 매부리코, 푹 파인 볼, 숙인 고개, 고뇌하는 표정, 갈색의 피부 색깔 등으로 금욕적 생활을 한 초월적 성자(聖者)로 표현하였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31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2) 정적주의(靜寂主義) (하)


성부 · 성자 · 성령의 고요한 어울림

 

 

 

- [작품2] 삼위일체: 템페라, 안드레아 루블료프 삼위일체 작품 모작, 120 x 94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붉은색으로 권능을 강조한 성부의 위에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 2)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의 집이 있으며, 성자의 뒤편에는 생명 나무가 있고, 성령의 뒤편에 바위를 둠으로써 신앙을 굳건히 하는 성령을 표시하고 있다. 앞에 놓인 그릇에는 대접하기 위한 송아지 머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희생을 의미하며 성자께서 축복하신다. 발판을 보면 역원근법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성자 앞 탁자의 선(線)과 성부와 성령의 무릎으로부터 발까지 이어진 선을 연결하면 커다란 잔이 이루어지고, 그 잔 위에 성자께서 성체의 모습처럼 보인다. 성자 하느님의 오른쪽 어깨로부터 밑으로 내린 황금색 띠처럼 보이는 것은 ‘클라부스’라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

 

 

2. 빛의 흐름

 

나라마다 빛을 내어주는 태양신에 대한 신화는 많습니다. 빛은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빛은 생명·행복·율법·지혜와 결부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타보르산에서 그리스도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부활과 다시 오심’을 미리 보여준 상징이었습니다. 빛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구약에서 드러난 야훼의 영광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빛 중의 빛이며 세상의 빛이었습니다.(요한 1,1-14 참조)

 

조화와 비례는 아름다움을 측정하는 기본 원리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빛은 조화나 배합에 의하지 않고도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고 그에게서 나온 빛이 아름답다면, 그와 닮은 우리 안에도 빛이 있기에 충분히 영적·심미적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빛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 서적에서 영성(靈性)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면서 그 의미도폭넓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바오로 서간에 나타납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곧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 합니다. 영적인 사람(1코린 2,13-15 참조)이란 물질적인 실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영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성이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신앙 서적에 요약하였습니다. 영성은 마음의 고요(정적) 안에 머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빛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빛은 환하고 따뜻하기에 주변 모든 사람을 환하게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작품1]

 

 

- [작품1] 바오로 사도: 템페라, 198 x 106cm, 안드레아 루블료프 작품, 15세기 초, 트레차코프 갤러리, 모스크바. 작가의 화법에 따라 좁고 둥근 형태의 어깨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겸손을 강조한다. 이마는 밝게 빛나며 지혜가 가득한 지성을, 눈은 고요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안드레아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성화입니다. 고요함과 침묵으로 영혼의 평정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 이콘은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에서 손님 대접했던 세 천사의 모습(창세 18장 참조)이 담겨 있습니다. 세 천사는 서로 마주 보며 걸터앉아 있고, 정적인 동시에 부드러운 움직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권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성부와 왕이신 자색의 성자와 생명이신 녹색의 성령께서 조용히 의논하시는 듯합니다. 세 분의 구성이 ‘고요한 어울림’이란 단어를 연상케 합니다.

 

루블료프는 색을 강하게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옷을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으로 나누어 표현하였습니다. 외부의 빛은 약간의 청회색에서 백색으로 내려와 옷 위를 비추고, 내부의 빛은 옷이 접혀 어두운 부분을 오히려 황색으로 칠해 은은하게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선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리듬도, 투명한 듯 밝은 의복의 색채도, 모두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내면적이면서도 생명의 근원에서 비롯한 분위기는 정적·위안·따뜻함·기쁨·평안을 느끼게 합니다. 정적주의가 추구하는, 즉 신을 향하는 관상이 이 세상에서도 주어진다는 것을 이 이콘은 깨닫게 합니다. 거의 투명한 의복으로 가려져 있는 천사의 젊고 부드러운 몸은 영적인 홀가분함과 위엄과 빛을 나타내고, 물질적인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온몸을 감싼 옷과 다정히 대화하는 듯한 몸의 자세가 잘 어우러져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 분은 천사의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성부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강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붉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을 ‘강하신 분’이나 다른 한편에는 ‘무한한 사랑을 갖추신 분’이라는 의미로 루블료프는 외부의 빛과 접힌 옷 주름 사이에서 나오는 내부의 황색빛으로 붉은색을 부드러운 붉은 갈색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식탁 가운데 계신 성자 하느님은 청색 옷을 겉에 두르셨습니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기에 하느님의 색깔입니다. 그리고 세분 모두 청색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는 ‘밖으로 드러나신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청색 옷을 겉에 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화를 보고 있노라면 연노랑 달맞이꽃 색깔의 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들판을 산책하는 느낌입니다. 쏟아지는 빛의 소나기에서 고요함과 거룩함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독과 고통과 근심으로 점철된 세상의 삶을 바라보며 잠 못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고뇌를 연상케 합니다.(시편 121, 4) 왜냐하면 성자께서는 잔 안에 놓인 송아지 머리를 축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잔 가까이 다가간 성자의 두 손가락은 인성과 신성을 의미하고, 보이지 않는 세 손가락은 합쳐져 삼위일체를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 이름으로 송아지 머리가 들어 있는 잔을 축복하시고, 사람을 위해 희생 제물로 오실 것을 은연 중 암시하는 듯 합니다.

 

성령께서 입으신 녹색은 나무에 새싹이 돋듯이 새 생명·희망을 상징합니다. 녹색 옷에도 외부의 빛과 접힌 옷자락을 어둡게 하지 않고 몸에서 나오는 내부의 황록색 빛의 흐름으로 부드러운 연두색을 보여줍니다. [작품2]

 

 

- [작품3] 구세주: 템페라, 158×103cm, 트레차코프 갤러리, 모스크바, 러시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불행히도 이 구세주 이콘을 층계의 발판으로 사용하였다. 어깨가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

 

 

루블료프의 작품 중 ''구세주'' 이콘이 있습니다. 루블료프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면서 신으로서 위엄을 극도로 강조하지 않으면서, 내면의 빛을 부드러운 선염법 채색 화면이 채 마르기 전, 다시 채색하여 번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채색법으로 그려냈습니다.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얼굴은 위엄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루고, 정숙과 평안·침묵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품3]

 

앞서 말한 초대 교회의 근간에 깔린 신학 사상이 성 미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어쩔 수 없이 외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조건으로 하느님과 만남을 위해 큰 노력을 해왔습니다. 사상과 사유의 방법은 각기 달라도 결국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주고받아, 결국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맥락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7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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