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강론자료

2020-10-04.....연중 제27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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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0-10-03 ㅣ No.2359

                                                           연중 제27주일 (가해)

이사야 5,1-7      필리피 4,6-9       마태 21,33-43

2020. 10. 4. 군인주일로....

주제 : 올바른 열매를 맺을 임무!

세상의 어떤 일도 시작하기만 하면 결실을 만듭니다. 그 결과에는 내가 만족할 것이냐, 아쉬움을 가질 것이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으로서 결실이 좋은 것으로 오게 하려면 그 방법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힘겨워서 행동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핑계를 대면서 행동하지 않아서 내가 삶에서 얻는 결과가 만족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삶을 돌이켜서 좋고 올바른 결실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에 합당한 삶의 태도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군인주일로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후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모든 일에 똑같은 정성을 드러내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정성을 모으는 일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밭을 만들고, 그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포도원을 맡긴 주인이 자기 몫의 수확물을 얻는 일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바꿔서 표현하면, 사람으로서 각자의 삶에 성실하다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드러낼 것이냐에 관한 일을 생각하게 하는 주일입니다. 주인에게 밭을 빌린 값을 내야 하는 소작인들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땅을 가졌다고,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또 그 땅과 포도원을 나에게 빌려줬다고, 주인이라는 사람은 일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내가 땀을 흘려 벌어드린 땀방울의 결과를 바치고 나누어야 하느냐는 사람의 논리로 생각하면, 매우 화가 나고 서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소작인들은 땅을 빌려서 얻은 대가인 소작료를 받으러 온 종들이나 마지막에 찾아온 주인의 아들에 대하여 불편한 행동을 하고,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소작인의 무리에서 자기들의 행위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돌이킨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초점은 소작인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돌이켰을 거라는 전제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연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행동해도 괜찮은 일을 했다고 말할 것이고, 자기들이 한 행위에 잘못은 없다고 여길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현실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 관하여,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살도록 해주셨다는 신앙의 내용에 관하여 어떤 자세를 드러내는지 살피는 일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세상의 일에는 분명히 옳고 그른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생각하거나 내 마음과 뜻대로 바꾸어 알아들을 때, 나의 삶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복음에 나온 소작인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사야예언서에서 들은 것처럼, 포도밭을 일구고 좋은 나무를 심었는데도, 포도밭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를 열매로 맺은 포도나무와 같은 것이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이 되는 행동입니다.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들포도가 열렸다면 포도밭의 주인은 그 들포도를 향하여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내가 들포도의 처지라면, 주인이 나를 향해서 하는 일을 아무런 불만도 없이 그대로 인정할까요, 아니면 포도밭의 주인이 할 수도 있는 과격한 행동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거부하는 자세를 보이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개인의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다고 말해도, 그 생각과 판단이 순리에 어긋난다면, 내 의사와는 다른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좋은 포도나 들포도는 삶의 결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 판단하는 것과 같은 사정을 생각할 방법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 것을 나의 삶에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쓸데없이 생각한다고 여겨야 할까요? 내가 만나고 누릴 세상이 오로지 현실로 끝난다면, 들포도의 처지에서 어떤 결실이어도 문제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의 세상이 그래도 괜찮으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사람이나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상에서 어떤 결실이어도 문제가 없다는 태도는 아니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서 대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도 살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삶의 결실이 다른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을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올바른 길을 간 결과이며, 그 결과가 나에게도 좋은 것이 되고, 내가 주변의 사람을 만날 때 부끄러운 삶의 결실이 아니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 결과를 위하여 우리는 어떤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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