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5: 면천 군수 박지원과 김필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17 ㅣ No.1336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5) 면천 군수 박지원과 김필군


연암 박지원, 지도자급 골수 천주교 신자 김필군을 방면하다

 

 

- 연암 박지원 초상화.

 

 

집 한 채 값을 주고 산 예수 성화

 

서학이 온 조선을 관통해 지나가던 시절, 박지원은 서학이 가장 극성했던 충청도 지역에서 면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이곳 면천에 1797년 윤 6월 26일에 부임해서 1800년 8월 18일에 이임했다.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은 천주교도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 천주교도 검거 실적을 놓고 병영(兵營)과 벌여야 하는 신경전도 피곤했다. 온건한 처리를 주장했던 연암은 이 와중에 끼어 큰 애를 먹었다.

 

연암이 면천 군수로 내려간 이듬해인 1798년이었다. 범천면(泛川面)에 사는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천주교 책자와 성화를 들고 군수 앞에 나타나 자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 수배되자 겨우내 달아나 숨어 있었던 자였다. 그가 들고 온 책자는 열심한 신자였던 죽은 아들의 것이었다. 김필군도 도저히 교화가 안 된다고 아전들조차 고개를 저었던 열성 신자였다.

 

죽은 아들은 어질고 착했다. 과거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읽은 천주교 교리서의 뜻을 친절하게 풀이해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얘기를 들으며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아들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런 아들이 1795년 갑자기 죽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죽어 하늘나라에서 아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럴수록 아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하나하나 귀에 생생했다.

 

아들의 손때 묻은 물건은 그 책밖에 없어 혹시 잃어버리거나 때가 묻을까 봐 열 겹으로 싸서 소중히 간직했다. 밖에 나갈 때도 몸에 꼭 지니고 다녔다. 책자는 모두 12권으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성화 한 폭도 있었다. 아들은 이 그림을 서울서 사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워낙 정교해서 처음엔 수놓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직접 그린 그림인 줄을 깨달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인쇄된 원색의 채색 성화(聖)였던 듯하다. 입체적 질감의 서양 그림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수놓은 것인 줄 알았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아들은 이 그림을 구입하는데 200냥이나 되는 거금을 주었다고 했다. 200냥은 그때 돈으로 서울에 엔간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에게 이같은 서양 성화가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었는지 실감 나게 해주는 액수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 한 장에 거금의 가산을 탕진했지만, 자식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아까운 줄을 몰랐다.

 

 

이제 신앙을 버립니다

 

김필군은 그가 그토록 아꼈던 아들의 귀한 책과 성화를 들고 군수 앞에 제 발로 나타났다. 이제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이 이랬다. “아들이 죽은 뒤 4년 사이에 이따금 꿈에 보이기는 해도, 천주학의 일로 묻고 답하지는 않더군요. 또한 가서 좋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지도 않아, 살았을 때와 죽고 나서가 판이합니다. 기대하고 바랐던 것이 문득 어그러지니, 이것만 보더라도 절로 알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쌓은 공이 과연 어디에 있답니까?”

 

아버지는 그리운 아들이 살아 그렇게 열심히 믿었으니, 꿈에라도 자기는 천국에 가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꿈에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다지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그토록 재미나게 들려주던 책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았을 때 말씀을 기쁘게 믿어 달게 따른 보람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천주가 대체 있기나 한 것이냐며 신앙을 완전히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지원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가 올린 소지(所志)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적어주고는, 감옥에 가두는 대신 그저 물러가게 했다. 그가 바친 책은 장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필군의 손으로 직접 불태워 버리게 했다. 하지만 병영에서 갑자기 사람이 내려와 김필군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애초에 김필군을 자신들이 체포한 것으로 조서를 꾸며 자기의 공으로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통에 연암의 입장만 난감해졌다. 병영에서는 군수의 태도를 문제 삼아 감사 이태영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연암은 “태양이 떠오르면 도깨비들이 날뛰지 못하고, 훈풍이 건듯 불면 얼음과 눈이 절로 녹듯” 형정(刑政)이 아닌 교화로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뜻으로 감사 이태영에게 해명을 겸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고는 책을 감사에게 이미 보낸 것으로 처리해서 병영 쪽으로 김필군이 끌려가는 것을 막았다. 연암은 김필군에게 불리하지 않게 하려고 병영과 감사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그들 부자의 신앙생활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아껴서 썼다. 이 내용은 「연암집」 권 2에 실린 「상순사서(上巡使書)」에 자세하다.

 

김필군이 살았던 면천군 범천면(상단 푸른색 네모) 지도. 하단 이존창이 살았던 두촌면과 아주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출전 청구요람.

 

 

김필군은 정말로 배교했을까?

 

연암이 「상순사서」에서 쓴 김필군의 사연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이때 김필군의 배교는 정말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들을 따라 덩달아 믿었던 서학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7년 전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별지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별지에는 면천, 충주, 보령, 청주, 청양, 홍주, 예산, 덕산, 천안, 직산 등지에서 검거한 천주교도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학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이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면천이 첫머리를 차지한 것을 보면 이곳의 천주교 신자가 인원도 가장 많고, 규모도 컸다.

 

이 명단의 앞쪽에 나오는 강주삼, 황아기, 박일득은 이 지역 천주교 세력의 리더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바로 이어 김필군의 이름이 나온다. 아들이 과거를 보았다고 했으니, 그는 양반 신분이었다. 그 또한 이 지역의 지도자급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명단이 앞쪽에 놓인 이유다. 그가 간직했던 성화는 이들이 미사를 볼 때 자랑스레 내걸렸던 물건임에 틀림없다. 이어 나오는 김대윤과 김가상 중 한 사람이 1795년에 죽었다는 그의 아들일 것이다. 나란히 놓인 것으로 보아 김대윤이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김가상은 한 집안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때도 이들은 서학책 21권을 들고 자수해서 관청 뜰에서 직접 불태웠다. 배교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당시 21권의 서학책을 들고 자수한 김필군과 김대윤, 김가상 세 사람은 요즘 식으로 말해 1개월 보호 관찰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당시는 진산사건의 여파로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도 검거 선풍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쳤던 때였다. 김필군 부자가 보관하고 있던 서학책이 21책이나 되었다면, 그의 집안이 이 지역 천주교도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핵심 수뇌였다는 뜻과 같다.

 

그랬던 그가 그로부터 무려 7년 뒤인 1798년에 다시 서학서 12책을 들고 군수 박지원 앞에 자수했던 것이다. 이 12책은 앞서 관청 뜰에서 불태웠던 21책 외에 따로 숨겨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이에 새로 마련한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김필군의 두 차례 배교는 일단 큰 바람을 피하고 보자는 눈속임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후로도 이들 부자는 이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고, 아들이 죽은 뒤에도 김필군의 신앙 활동은 지속되었다.

 

 

연암의 관대한 천주교 신자 처리

 

박지원은 「상순사서」에서 김필군 검거 당시의 정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그가 살던 범천면(泛川面)은 오늘날 당진시 면천면이다. 그는 1797년 겨울 천주교도 검거 소식에 도망갔다가, 1798년 9월에 슬며시 돌아왔다. 당시 오가작통(五家作統)에 묶여있던 주민 하나가 연좌를 피하려고 이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연암은 그를 즉시 체포하지 않고 그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엉뚱하게 환곡(還穀)을 독촉하는 나졸을 보내 그를 불렀다. 연암은 “그 뜻이 실로 마치 알듯 모르게 하는 가운데,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있었다(意實在於若知不知之中, 有意無意之間)”고 글에서 썼다. 드러내지 않고 그를 불러 감화시키려 했다는 뜻이다.

 

달아난 죄를 추궁할 줄 알았는데, 사또가 환곡을 왜 안 갚느냐고 부르자, 김필군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천주교 책자 12권과 성화 한 폭을 들고 소지(所志)까지 바치며 자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연암은 그가 어리석고 무식해서 책이 있어도 읽지도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글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연암이 글에서 쓴 것처럼 아들만 믿고 따랐던 어수룩한 신자가 아니었다. 여러 아전들이 병영 하리(下吏)의 추궁에, “이전에 서학을 학습하던 자는 저절로 사라져서 모두 평민이 되었고, 그 가운데 김필군이란 자는 가장 교화시키기가 어려웠는데, 일전에 또 제 발로 와서 책을 바쳤으니, 이제 이곳 경내에는 다시 의심할만한 것이 없소”라고 한 대답에서도 확인된다. ‘가장 교화시키기가 어려웠다(最是難化)’, 즉 그는 이 지역의 지도자급 골수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 신자들을 처리하는 박지원의 이같이 관대한 처리에서 천주교에 대한 그의 태도의 일단을 짐작케 된다. 그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고, 거부의 뜻도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다스릴 문제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 이희영과 한재렴 같은 천주교를 믿었던 제자들이 포진했던 것도 은연 중 평소 그의 이런 태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1,34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