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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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41: 세상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느님 반영하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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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18 ㅣ No.1594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1) 세상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느님 반영하는 ‘거울’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 세상은 하느님의 선이다. 사진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십자가 행렬을 하고 있다. [CNS]

 

 

성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우주(세상)를 교향곡에 비유한다. 모든 것이 부분을 이루고는 있지만, 우주의 중심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각자의 음을 내기에 온 우주의 존재 자체가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이 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보는 우리 마음의 눈이 이런 경외와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공동체와 우리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은 새로운 국면, 곧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태 영성’이고, 또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 그대로,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이고 포용하는 영성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주어진 본래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것이고 급기야는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마저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우주는 그야말로 하느님으로 꽉 차 있는 ‘의미의 알’이기에, 이 시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이 의미의 알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생명력을 계속해서 낳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체론적 세계관과 영성은 하느님의 육화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대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신 분”이시다.(콜로 1,15-20 참조) 그래서 그분은 ‘반대의 일치’이고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아이콘’이시다.

 

그렇기에 우리 피조물 하나하나는 전체, 곧 하느님을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해 주는 거울이고, 또 그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장소이기에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세상은 하느님의 선을 지닌 또 다른 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그 내면의 충만한 의미는 이런 관점에서 반드시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 마음과 그 마음의 눈이 이 통합된 세계관을 바라보고 품을 수 있다면 우리 영혼과 우리 사회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나누는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교향곡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전체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지 않고 가짜 자아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이 지구를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서로 대적하고 서로 위에 올라서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싸움터로 만들어버렸는지 모른다.

 

지금은 이 지구 상에서 아직 문명의 이기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일부 부족들에게만 남아 있는 ‘남성 입문’이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남성들의 ‘성인식’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남성 입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진정한 인격체로 살기 위해서 부족 전체, 곧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2005년도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세계 수련장(Novice Masters) 모임에 참석했을 때, 당시 아프리카 총평의원이었던 신부님이 남성 입문과 관련하여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준 기억이 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있어 수련기는 어찌 보면 입문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신부님의 남성 입문 체험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가 15살쯤 되었을 때 그 정도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모여 촌장 앞에서 간단한 예식을 한 다음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정글 속으로 내쳐져서 3개월여(기간이 6개월인지 3개월인지 정확하지 않음)를 지내다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 입문 예식의 첫 단계였다고 한다.

 

이 기간에 정글에서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글에서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으며 생존을 위한 각고의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고 한다. 이 기간에 그들은 부족 사람들 전체와 부족의 영과 하나 되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 살아남는 것은 부족 전체 사람들의 영과 하나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이때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입문 예식의 첫 단계요 주요 단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이때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체험하며, 이 위대한 존재의 사슬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단계를 마치고 마을에 돌아온 아이들은 몇 가지 예식을 거치면서 다 함께 그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공적으로 선언된 후 입문 예식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16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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