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3일 (목)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꾸르실료

[한국] 한국 교회의 단체: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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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1-06 ㅣ No.29

[한국 교회의 단체 · 13]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1)

 

 

1. 탄생 배경과 창립 : 교회사적 맥락에서의 의미

 

꾸르실료는 스페인어 ‘Curso(코스, 과정)’에 ‘짧다(short)’는 뜻의 접미사 ‘-illo’로 결합된 말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단기과정(a short course)’을 의미한다.2)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단기과정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꾸르실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전통적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근대 이후 서구 사회의 세속화 물결과 19세기에 세 차례에 걸친 내전을 겪으면서, 20세기 초에는 반가톨릭 정서와 이념이 팽배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해법을 찾고자 했던 젊은이들 그룹은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계획하였고, 이들을 이끌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꾸르실료의 시작이다.3) 1948년 스페인 마요르카 교구의 후안 에르바스(Juan Hervas) 주교와 에드와르도 보닌(Eduardo Bonnin) 등은 성지순례를 위한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었던 꾸르실료를 교회 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하였다.4) 이후 꾸르실료운동은 1950년대 초반에 남미로, 1957년 미국으로, 1960년대에는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는 미국을 통해 받아들였다.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장기와 달리 성직자들이 주도하던 꾸르실료운동을 본래의 모습인 평신도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꾸르실료를 교회 내 신심운동으로 인정하면서 주보성인으로 성 바오로 사도를 정해주었다.6)

 

 

 

한국에서는 1966년, 미국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케빈 오도넬(Kevin O’Donnell)이 서울에서 필리핀 사업가 에드문도 카이모(Edmundo F. Kaimo)를 만나면서 예기치 않은 출발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꾸르실리스따7)였기에 한국에 꾸르실료를 전파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 결과 1967년 5월 4일 성수동 성당에서 제1차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다. 3박 4일 일정은 필리핀 봉사자들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한국인 사제 2명, 메리놀회 사제 2명, 평신도 17명이 참석하였는데 이해남, 문창준, 장진, 김정진, 현석호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제2차 꾸르실료를 거치면서 한국 봉사자들은 자체적으로 꾸르실료를 실시할 수 있게 되어, 같은 해 8월 24일 서울 정동 명도원에서 실시한 제3차 꾸르실료는 한국어로 진행할 수 있었다. 9월 7일 서울대교구 교구장 서리 윤공희 주교는 꾸르실료를 공식적인 교회운동으로 정식 승인하였고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사무국 임원을 임명하였다.8) 이후 꾸르실료는 1968년 인천교구와 부산교구, 1969년에는 전주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 청주교구, 원주교구, 수원교구, 대전교구로 전파되어 나가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9)

 

 

 

 

2. 현재 활동 : 현재 세상과 교회의 상황에 대한 응답

 

꾸르실료운동의 목적은 ‘자신의 회심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여 회심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살게 하며, 우정그룹을 형성하여 각자가 속한 환경(교회, 가정, 직장, 사회)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10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변화가 핵심이며, 그 방법은 케리그마적 방식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살며, 다른 이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이 케리그마 방식이다. 또한 꾸르실료운동은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기 위하여 반드시 공동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습득하기 위해 꾸르실료운동은 세 가지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단계는 꾸르실료 이전(Pre-cursillo)이다. 고유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찾아서 선발하고 준비시키는 단계이다.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진 이들을 우선적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큰 영향력이나 리더십으로 자신의 환경을 복음화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이들도 대상으로 한다. 둘째 단계가 꾸르실료이다. 참여자들이 자신과 만나고 그리스도와 만나며 다른 이들과 만나는 삼중의 만남을 체험함으로써 회심하게 하여 환경을 복음화시키는 사도로 거듭나게 한다. 셋째 단계는 꾸르실료 이후(Postcursillo)이다. 꾸르실료를 체험한 개인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어 이 세상을 하느님의 계획에 맞게 건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나누며 회심 과정에서 서로 돕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 그룹들(‘그룹 재회’와 ‘울뜨레아’11))의 촉진을 의미한다.12)

 

세 가지로 이루어진 과정 중에서 참여자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두 번째인 ‘꾸르실료’ 과정이다. 이때 경험하는 회심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울뜨레야’가 뒤따른다. 그렇기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역사에서도 제3차 꾸르실료가 끝나고 20일 후인 1967년 9월 17일에 제1차 서울대교구 울뜨레야가 명동성당 회의실에서 열렸다.13)

 

한편, 꾸르실료는 남성과 여성이 별도로 실시되기에 여성 꾸르실료는 1971년 8월 15일에 처음 진행되었는데, 이때도 남성 꾸르실료와 마찬가지로 필리핀 봉사자들이 영어로 진행하였다. 이듬해인 1972년 1월과 8월에 한국 봉사자들로 구성된 꾸르실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여성 꾸르실료도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14)

 

꾸르실료 과정이 상시적으로 실시되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사무국과 실행할 공간, 즉 회관이 필요하다. 1974년 12월 1일,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5가에 있던 성 빈센트 드뽈 수녀원이 이전한 장소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을 개관함으로써 안정적으로 꾸르실료를 실시할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15) 이후 서울대교구 꾸르실료는 신축회관 건축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고 모금을 했으나 교구 방침에 따라 이를 중단하였다.16) 그러다가 1988년 세계성체대회 기념교육관을 꾸르실료에서 건립하여 회관으로 사용하라는 교구의 승인이 떨어져서 절두산 순교성지 안에 있는 교육관을 건립하여 1990년 6월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17) 이처럼 꾸르실료 과정이 자리를 잡아갔기에, 뒤따르는 또 다른 사업은 상설 지도자학교를 개설하는 것과 본당에서 울뜨레야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일이었다.18)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활동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해외에 있는 한인 신자들을 위해 현지에서 꾸르실료를 실시한 일이다. 1980년 미국 시카고를 시작으로 1981년 캐나다 토론토, 1992년 벨기에 바뇌 피정의 집, 미국 하와이, 1993년 호주에서 한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꾸르실료를 실시하였다.19)

 

또 한 가지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활동의 중요한 특징은 청년 꾸르실료를 시작하여 발전시킨 점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해본 적이 없는 모험이었으나 2000년에 남성, 여성 꾸르실료를 처음으로 각각 시작해서 정착시킨 후 2010년부터는 혼성으로 실시하였다.20)

 

꾸르실리스따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위한 재교육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87년 서울대교구 꾸르실료는 ‘꾸르실료 재교육’을 실시하였다.21) 이것이 2003년에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학교 형태인 ‘리더스쿨’로 개설되었다. 처음에는 2년 과정으로 진행되었으나 제4기부터는 1년 과정으로 실시되었는데, 꾸르실료에서 가장 핵심인 ‘꾸르실료운동의 기본사상’뿐 아니라 성경의 이해, 가톨릭 영성 강의, 사회교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리더스쿨은 강의 이외에도 피정, 현장 봉사활동 등을 실시하여 꾸르실리스따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함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22)

 

서울대교구 꾸르실료는 2012년 ‘신앙의 해’를 지내면서, 실천적 신앙운동의 일환으로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해외성소장학회’를 발족시켰다. 이를 통해 가난한 나라, 특히 종교적으로 공산주의 통치에 있는 나라의 신학생을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육시킨 후 본국에서 사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23)

 

 

3. 전망 :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방향

 

2017년 10월 28일, 제17차 서울대교구 울뜨레야가 열렸다. 이는 꾸르실료 한국 도입 50주년을 기념한 서울대교구 꾸르실료의 행사였다. 당시 서왕석 주간은 “이번 울뜨레야는 은총의 50주년을 보내고 희망의 100년을 향해 새롭게 도약하는 출발점”이라면서 “모든 꾸르실리스따들이 주님을 찬미하며 복음화의 사도로 거듭나는 희망의 잔치”라고 설명했다.24) 이날 행사에는 4,500여 명의 꾸르실리스따들이 함께 모여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하였다.

 

1) 부르심에 늘 응답하고

2) 더욱 친밀한 우정의 그룹을 형성하며

3)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이끌며

4) 기도와 성찰, 희생, 봉사로 미래 꾸르실료 초석을 다지는 데 힘쓰겠다.25)

 

이처럼 꾸르실료는, 50주년의 다짐대로 본래의 카리스마에 충실하여, 자신들이 체험한 복음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고, 각자가 속한 환경(교회, 가정, 직장, 사회)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

 

1) 1992년 5월 25일 발행한 『교회와 역사』 제204호 8~9쪽에 한국 꾸르실료 협의회를 소개한 바가 있다. 이번 글은 서울대교구 꾸르실료에 초점을 두어 새롭게 작성하였다.

 

2)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홈페이지(https://www.seoulcursillo.or.kr) 참조.

 

3) 『한국 꾸르실료 50년사』(이하 『50년사』), 꾸르실료 한국협의회(2018), 28~29쪽.

 

4) 『50년사』 29~30쪽. 꾸르실료의 역사와 정신에 대해서는 가톨릭신문에 여러 차례 소개된 바가 있다. 가톨릭신문 1971-10-10 제786호 4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11130257912)과 1982-05-16 제1305호 4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105100103530) 등 참조. 또한 에드와르도 보닌은 1972년 4월에 방한하였다. 이에 대한 기사는 가톨릭신문 1972-04-30 제813호 4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8040231893) 참조.

 

5) 『50년사』 31쪽.

 

6) 위와 같음.

 

7) 3박 4일간의 꾸르실료를 체험한 사람. 『꾸르실료운동의 기본사상』, 꾸르실료 한국협의회(1996), 268쪽.

 

8) 『50년사』 52~55쪽. 한편, 가톨릭신문을 검색해보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꾸르실료 기사는 1967년 11월 9일~11일 열린 제4회 꾸르실료이다. 이 기사에는 교구장의 정신 인준을 얻어 ‘꾸르실료 교구사무처’와 ‘지도자양성학교’ 책임자들이 임명되었음이 나와 있다. 가톨릭신문 1967-10-22 제590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308110201362) 참조.

 

9) 『50년사』 55쪽. 가톨릭신문에는 1969년 대구와 광주에 꾸르실료 사무국 설치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가톨릭신문 1969-07-20 제678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312210228667)과 1969-08-17 제681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310270216653) 참조.

 

10) 『50년사』 38쪽.

 

11) ‘그룹 재회’ : 꾸르실료 이후 우정과 은총을 나누는 분위기 속에서 그룹의 구성원으로 크리스찬으로서의 기본적인 것을 확실히 하고 계속적이며 점진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 ‘울뜨레아’: 구성원들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회개하는 태도를 갖고 크리스찬으로서의 기본과 환경을 복음화하는 것을 함께 나누도록 하는 그룹 재회의 모임. 『꾸르실료운동의 기본사상』, 꾸르실료 한국협의회(1996), 268~269쪽. 한편, 서울대교구 홈페이지 사도직(사립)단체 코너에 있는 소개 글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https://aos.catholic.or.kr/pro10318/view?layApostolateNo=201004244&curPage=2). ‘팀회합’ : 꾸르실료를 다녀온 꾸르실리스따들이 팀을 이뤄 크리스찬으로서의 삶, 사도적 활동의 계획 등을 나누고 검토하는 모임. ‘울뜨레야’ : 울뜨레야는 스페인어로 ‘앞으로, 전진’이라는 뜻으로 팀회합들이 만나 이루어진 그룹. 울뜨레야는 팀원이 아닌 꾸르실리스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나누는 기회이며, 꾸르실리스따들이 주님의 사도로서 크리스찬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12) 『50년사』 41쪽.

 

13) 『50년사』 195쪽.

 

14) 『50년사』 197쪽.

 

15) 가톨릭신문 1974-12-15 제942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7130224651).

 

16) 『50년사』 199쪽. 이에 대한 기사가 가톨릭신문 1977-10-30 제1078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003060182454) 참조

 

17) 『50년사』 202~203쪽. 이에 대한 기사는 가톨릭신문 1990-06-17 제1709호 11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906100073700) 참조.

 

18) 『50년사』 199~200쪽.

 

19) 『50년사』 203쪽. 이에 대한 기사는 가톨릭신문 1980-03-30 제1198호 3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105020064920)과 1981-09-13 제1271호 1면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105090089443) 참조.

 

20) 『50년사』 205쪽.

 

21) 가톨릭신문 1987-11-08 제1579호 10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912310150037) 참조.

 

22) 『50년사』 206쪽.

 

23) 『50년사』 207~208쪽. 가톨릭신문 2013-04-21 제2842호 6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304170023580) 참조.

 

24) 가톨릭신문 2017-11-05 제 3068호 5면(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710310238696) 참조.

 

25) 『50년사』 212~213쪽.

 

[교회와 역사, 2025년 8월호, 현재우 에드몬드(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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