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6일 (목)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전례ㅣ미사

[위령] 위령기도 해설4: 염습(殮襲), 출관, 고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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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1-05 ㅣ No.2695

[돋보기] 위령기도 해설 (4) 염습(殮襲), 출관, 고별식

 

 

1. 바위가 못이 되게 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亞麻布)로 감쌌다.”(요한 19,40)라고 한 것처럼 세상을 떠난 이의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壽衣)를 입혀 관에 모신 다음 촛불을 켜고 기도합니다. 시편 113편은 이스라엘인들이 역사에서 체험한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신앙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찬양 시편입니다. 괴롭고 아픈 삶이 이어지는 이승을 떠나 비로소 완전히 구원되는 천상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인 장례의 성격을 잘 나타냅니다.

 

시편 113후(115)편은 이스라엘인들이 주변 민족으로부터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과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이방인의 신은 허깨비일 뿐이라고 외치면서 하느님의 권능과 그분을 향한 믿음을 드러내는 전례‧제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 5~7절의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내를 맡지 못하며, 만지지 못하고, 걷지 못하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를 시신(屍身)이라고 믿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4절 “그들의 우상(偶像)들은…”, 8절 “우상을 만드는 자도…”에서 나타나듯이 분명히 우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용을 음미(吟味)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노래하는 탓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깁니다. 입관은 가까운 이를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이어서 애절(哀切)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극에 달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잠시의 이별일 뿐 결국 하느님 품에서 다시 만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러니 끝없는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출관할 때 바치는 시편 41(42)‧42(43)편은 곧 쓰러질 만큼 극심한 갈증(渴症)을 풀어낼 수 있는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암사슴처럼 자기 고통을 없애고 평온을 되찾아주실 하느님을 간구하는 탄원 시편입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주님의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으니 더욱 가슴이 아프고 그분이 그립기만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당면한 고통을 해결해 주고 자기를 맡길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라는 믿음을 되살려냈습니다. 아무리 험난한 상황이 닥칠지라도 하느님만 바라고 찾아가면 그분 품에서 평온과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친(肉親)의 죽음과 같은 슬프고 아픈 일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그 어떤 고통의 올무도 반드시 벗겨 주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리라는 굳센 믿음과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시편 22(23)편은 신앙심이 깊은 이스라엘인의 작품이지만, 이스라엘을 넘어 수많은 민족이 오랫동안 즐겨 바칠 만큼 많은 이에게 익숙한 탄원 시편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있는 여러 나라의 작곡가가 이 시편으로 성가곡으로 만들었고, 한국 교회의 ‘가톨릭 성가’에도 여러 곡이 있습니다. 탄원 시편 가운데는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면서도 괴로움과 아픔, 터무니없이 당하는 모함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을 표출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변함없이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만 나타납니다. 어머니 품처럼 참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단 한시도 당신 양들인 우리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돌보시니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원의 풀을 뜯어 먹다 목이 마르면 샘가에 앉아 편안히 물을 마십니다. 이처럼 넓은 풀밭과 넉넉한 샘물이 흘러넘치는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 어떤 고난을 받을지라도 주저앉지 않고 곧바로 일어설 수 있는 당당한 어른이 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모든 위험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새로운 풀밭과 물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누구나 결국은 떠나야 할 이승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고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향해 기쁘게 나아가야 합니다.

 

성전을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실제로 찾는 존재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시편 83(84)편은 순례‧찬양 시편입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에만 생명이신 그분 앞에서 몸과 마음 모두 아무 거리낌 없이 뛰어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지은 이는 비록 지금은 찾아가지 못하기에 그저 애타게 그리워할 뿐이지만,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전에서 지내면서 누렸던 크나큰 기쁨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애태우다 지쳤을지라도 자기가 머물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은 주님의 제단뿐이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순례하면서 주님의 성전에 머무는 동안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얻었는데, 비록 안락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어찌 악인들의 공간에 한시라도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집으로 찾아가면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니 비록 그분의 문간일지라도 그곳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자비와 은총을 내리시는 분이시지만, 진정 그분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이는 그분을 굳게 믿는 사람뿐입니다. 당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고 따르는 이에게 주님께서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러니 그분께 모든 일을 맡기고 따르는 이는 누구라도 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출관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체험했던 하느님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여정(旅程)입니다. 참 평화와 즐거움이 넘쳐나는 집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곳은 오직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나라뿐입니다. 인간적으로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은 공간과 사랑하는 이들을 이별하는 애달픈 순간이지만, 이러한 고통은 찰나(刹那)에 불과할 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그분의 나라가 기다립니다. 떠나는 이에게도 보내는 이에게도 참된 희망과 위로를 주는 시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고별식을 거행하면서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리면서 부르는 ‘승리의 찬가’의 앞부분인 ‘하늘의 성인들이여’는 ‘운명 후에 바치는 기도’에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합니다. 고별식을 마치고 운구하면서 부르는 ‘천사들은’이라는 노래는 ‘승리의 찬가’의 뒷부분으로 천사와 순교자들의 인도로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이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승리의 기쁨을 소리높여 찬미합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0월호, 박명진 시몬(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상장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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