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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네 복음서의 배경과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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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24 ㅣ No.1165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네 복음서의 배경과 맥락

 

 

이번에는 네 복음서의 역사적 맥락이 독자인 저에게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렸을 때는 신약을 펴면 마태오 복음이 맨 처음에 나오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이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을 제일 빨리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십이 되어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배우기 시작해서야 성경의 편찬과 편집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분석가 훈련, 아이들 교육 등과 병행하느라 세세한 연대까지 꼼꼼히 따져 보지는 못했습니다. 집필된 시기의 중요성이나 저자의 특징들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고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성경의 역사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게 되면서 제 독서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나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도 성경에 대해서는 일천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지만, 정신과 의사라는 점을 내세우며, 육십이 훨씬 넘은 나이 핑계를 대며 감히 이렇다 저렇다 권위도 없는 이야기를 써 보게 됩니다.

 

우선 네 복음서 중 첫 기록인 마태오 복음입니다. 신약 전체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앞부분에 편집되어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흔히 편년체의 역사서에 익숙해서 제일 먼저 시작된 일부터 기록하는 반면에 성경은 일어난 사건의 시간별로 편집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교회사에서 혹은 신학적으로 제일 중요하다는 부분이 맨 앞에 등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 다른 사료가 있으면 다시 그 부분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어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이 신약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교회에서 중요하고 교회로부터 받은 권위가 크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마르코 복음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많아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다른 복음서 자료들(편의상 Q source, 혹은 M source라고 부릅니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집중적으로 기록한 마르코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은 어린 시절과 공생활 전후의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다채롭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많이 상상하게 만듭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전에는 마태오사도가 쓴 것이라고들 생각했었지만, 저작 시기나 문체 형식과 에피소드들로 추측컨대 유대 전통과 법률에 익숙한 후대의 신자가 그 저자가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이 다수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다 떼어 버리고 담백하게 수난과 부활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일설에는 성경 저자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고도 하고, 또는 베드로가 바로 전한 것은 아니고 전승의 하나라고도 합니다. 누가 되었건, 확인할 수 없는 사생활에 대해서 언급을 피한 것을 보면 매우 철저하고 엄정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신약 성경에 비해 바울로의 영향이 가장 적고 현대인은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고대의 과장된 수사와 묘사도 없습니다. 어쩌면 바울로가 활발하게 공생활을 하기 전에 이미 기록된 경전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서기 70년의 독립전쟁 실패로 처참하게 성전이 파괴된 시점에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과장되고 아름답게 문학적 묘사를 해낼 여유가 없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봅니다. 조금 과장되고 자신을 내세우는 바울로에 비해 모든 것이 완벽한 예수님을 수백 배 이상 좋아하는 저로서는 마르코 복음을 읽을 때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루카 복음도 사도행전이 완성되기 전 먼저 집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루카 복음의 특징으로 병자를 포함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의 치유 기적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의사인 저로서는 예언자나 구원자 이미지보다 치유자로서 예수를 받아들일 때, 개인 생활에 적용하고 메워 나갈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인종, 지위, 성별, 재산 같은 세속적인 조건들과 전혀 상관없이 모든 병자들을 다 애틋하게 여기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기술은 의사로서의 삶에 회의가 들 때 특히 위로가 되고 자칫 흐려지는 판단과 인식을 다시 제자리에 놓게 만드는 책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은 아마도 가장 늦게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그 저자는 아닐 것입니다. 묵시록의 저자와 확실하게 동일하다는 증거 또한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학자들이 연구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공관 복음이 사건 중심인 것에 비해 요한 복음이 심층적으로 재해석한 영적 영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 영적 스승으로서의 저자 요한은 그 당시 특출한 능력을 가진 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특별한 아들이자 성령의 육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게 도와주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주류가 아닌 영지주의 문헌에서도 많이 인용된다고 합니다. 공관 복음, 즉 내용이 비슷한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과는 확실히 다르게 신앙의 비밀스런 핵심을 알려주고 양육해 주는 특별한 복음서입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고대 유대 문명이 붕괴되고 있던 시점의 절박함과 고통들이 행간에 또 문장 곳곳에 뿜어져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이끌어 줄 지상의 왕에 대한 군중들의 기대와 달리 “하느님의 나라”라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희망을 말씀하셨고, 적과 싸워 이기라는 폭력적인 선동 대신 “내 평화를 주고 간다.”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남기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깊은 죄책감도 아프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감정들은 아마도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과 이별한 이후, 인류에게 면면히 내려오고 앞으로도 지속될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픔과 좌절과 외로움을 묘사하는 어떤 문학적인 수사나 관용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마음 깊이 아픔의 파도가 이는 까닭이 되겠지요.

 

복음서가 쓰여진 역사문화적 배경을 몰랐을 때는 복음서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그렇다면 과연 이 문헌들이 철저하게 고증을 거친 정말로 가치 있는 사료에 근거하는 걸까 하고 회의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이나 필기도구가 귀했던 고대, 주로 사람의 구전을 통해 불완전한 기억을 딛고 많은 사료들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네 복음서가 철저하게 동일하다면 오히려 더 위작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주 창조조차 일주일 안에 끝났다고 주장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성서학자와 교회학자들이 성경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제공되면서 21세기에는 미처 생각 못했던 또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어차피 각 개인이 생각하는 “진실과 오류”라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마련이라는 사실, 또 자신이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말들도, 우주를 관통하는 진실에 비하면 티끌 안의 한 원자나 분자보다도 작고 그 시효와 크기가 짧고 작습니다. 그러니 복음서가 진실인지 어떤지 왈가왈부할 시간에 그것을 읽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마 그 성장의 과정조차 얼마나 성실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앞에 두고는 살지만, 성경 독자로서의 저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조차 벅차다는 느낌 말고는 사실 아무것도 말할 형편이 못 됩니다.

 

[월간 빛, 2024년 4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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