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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와 마음읽기: 우정의 관계를 쌓는 일(가르시아 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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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와 마음읽기] 우정의 관계를 쌓는 일(가르시아 효과)
모든 사람이 행복과 만족을 느끼며 사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계급사회이지만 모두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그 비결이 뭘까? 그들은 인간을 어린 시절부터 과학의 힘으로 조작해 그걸 가능하게 한다. 소위 말하는 조건반사 훈련으로 계급에 따라 호불호를 만들어 성인이 된 후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그 조건반사 훈련 장면 중 하나이다.
8개월 된 아이들에게 책과 꽃을 주고 재미있게 놀게 한다. 그러다 아이들의 행복한 감정이 최고조라고 여겨질 때 갑자기 요란한 폭음과 금속성의 사이렌을 미친 듯이 울린다. 게다가 아이들이 있는 마루에 전류를 방류하여 고통을 준다. 당연히 아이들은 경악하며 공포에 질리게 된다. 그런 다음 자극을 없애주어 어느 정도 아이들이 진정되면 다시 꽃과 책을 보여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 움츠리게 된다. 다음 문장은 이 과정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책과 요란한 소리, 꽃과 전류 쇼크–이미 유아의 의식 속에는 이 조합이 멋지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훈련을 2백 번 반복하면 양자의 결합은 도저히 분리할 수 없이 견고한 개념이 될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결국 역(逆)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1955년 미국의 심리학자 존 가르시아(John Garcia)는 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가르시아 효과’라는 이론을 발표한다. 실험은 먼저 실험용 쥐들에게 사카린 섞은 물을 먹인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방사선을 쬐게 하여 구토를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다시 그 쥐들에게 사카린 물을 주었다. 그러자 실험용 쥐들은 달콤한 물을 좋아하는데도 사카린 물 복용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구토의 원인이 사카린 물이 아닌 방사선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물 섭취 후 신체적 위협 경험하면 원인이 음식이 아니어도 그 음식 거부
이처럼 ‘어떤 음식물을 섭취한 후 신체적 위협을 경험하면, 그 음식물 때문이 아님에도 원인을 음식에서 찾고, 이후에도 계속 그 음식을 거부하는 것’을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시험을 앞둔 학생이 처음으로 닭발을 먹고 복통을 경험한다면 어떨까? 아마 그 이후로 계속 닭발을 먹지 않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닭발이 상하지도, 않았고 함께 먹었던 친구 또한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으나 또다시 복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닭발을 원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통의 원인은 수험생 신분을 고려할 때 시험 스트레스로 인한 것임이 유력하지 않은가.
이렇게 가르시아 효과는 불쾌한 정서에 대한 인지적 자각 과정이 없이 원인을 음식으로 돌린다는 특성이 있다. 이는 특히 처음 대하는 음식에 더 쉽게 일어난다. 그 이유는 원시시대에 채집과 수렵으로 식량을 구했던 인류에게 낯선 먹거리 섭취 여부는 그 먹거리의 위험성이 생명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쾌한 경험의 원인을 모를 때 갖게 되는 모호함을 빨리 없애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가르시아 효과는 무의식 수준에서 이루어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먼저 반응하며, 나중에 진짜 원인을 알게 되어도 그것을 고치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음식에 대한 지나친 회피가 계속되어 불편할 경우, 해당 음식에 긍정적인 자극을 연합시켜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만들 수도 있다. 이 밖에도 가르시아 효과를 인터넷 중독이나 도박 중독 등 다양한 종류의 중독 치료에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중독이나 의존을 보여 문제가 되는 대상에 부정적인 자극을 연합하여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중독 행위를 감소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오래된 베테랑 단원이며 활동 결과도 꽤 좋은 B자매에게는 5년 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는 대녀가 있다. 대녀는 이웃에 살던 B자매가 늘 쾌활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영세하게 되었고, 영세 후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자연스레 제대회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대회를 그만두고 주일미사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B자매가 방문하여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대녀가 봉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발목을 삐는 일이 생겼다. 문제는 그가 영세 전 누군가가 “너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고통이 많아진다”라고 한 말이 기억났고, 실제로 발목을 다치니 그 말에 대한 확신이 생겨 봉사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자 영세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봉사를 잠시 쉬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B자매는 그녀가 남의 말을 잘 믿으며, 매우 세심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씩 조심스레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저는 대녀를 보면서 성당 선배들이 말이나 행동을 너무 가볍게 하는 것에 많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고통이 많아진다니요? 오히려 신앙은 고통 중에도 기쁨을 지닐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말했어야지요. 저는 대녀의 두려움을 떨치게 하려고 우선 기도가 습관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짧은 기도인 화살기도부터 수호천사께 드리는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 조금씩 늘려 가다 보니 이제는 시간이 되면 평일미사도 드리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입단은 망설이고 있는 걸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합니다.”
활동 대상자를 잘 살펴 그가 피하고 싶은 부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강렬한 부정적 정서의 경험을 다시 겪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그 경험은 그에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 마치 약점처럼 작용할 수 있다. 비록 그 상황의 원인이 잘못 규정되었어도 말이다. 이때 그를 도와준다는 그럴듯한 구실로 이것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레지오 단원들은 활동 대상자들, 특히 입교권면 대상자나 새 영세자, 새 단원을 대할 때 상대를 잘 살펴 그가 피하고 싶어 하는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배려이며 사랑이다.
물론 이를 위해 항상 친절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노고가 따르게 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개인적인 사도직이란 결국 다른 이들과 우정의 관계를 쌓는 일”(교본 310~311쪽)이기에 단원이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목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상훈에서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우리 주님을 다시금 뵙고 섬기시듯이 해야 함을 명령받고 있지 않은가!
혹시 나도 모르는 이유로 단원이나 활동 대상자와 관계가 틀어진 경험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문을 넘어 그들에 대한 원망이 내 안에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다음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힘으로 싸움을 펴야 하며 -중략- 혹시라도 교회의 병사들이 증오심을 지닌 채 악에 대항한다면, 성령께서는 오히려 증오에 찬 교회 병사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분투하실 것이다.’(교본 459쪽) 그러니 그 원인은 그들이 아닌 ‘나’일 수도 있다.
‘종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일단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해악은 어떠한 훌륭한 학문의 업적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교본 339쪽)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2월호, 신경숙 데레사(독서치료전문가)] 0 18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