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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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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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2-13 ㅣ No.701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상)

 

 

샤를 드 푸코. 예수의 작은 형제회 제공.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하는 신자는 부조리한 것을 꿈꾸는 셈입니다.”

 

나자렛 예수님을 유일한 본보기로 삼고 세상 끝까지 그분을 닮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 샤를 드 푸코 성인.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영성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이룬 수도회다.

 

성인은 ‘사하라의 사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성인이 척박한 사막에서 기도하고 관상한 영성가이자 토착민들에게 하느님을 전한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성인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좇으며 살던 청년이었다. 성인은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세 무렵 부모님을 잃고 외조부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기숙학교를 다녔지만 학업에도 성실하지 않았고, 엄격한 규율을 싫어해 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또 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이 됐지만, 방탕한 생활로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일도 있었다.

 

성인은 사하라 사막 탐험을 계기로 하느님께 회심하게 된다. 수년에 걸쳐 사막을 탐험하던 성인은 사막에서 만난 무슬림들이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1886년 프랑스로 돌아온 성인은 고해성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살아갔다. 세상과 떨어져 수도원에서 7년, 나자렛에서 긴 침묵과 노동으로 3년을 보낸 성인은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달았고, 프랑스로 돌아와 1901년 사제품을 받았다.

 

성인은 다시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영적인 가난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의 선교는 선함과 우정이라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설교나 자선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보여줬다. 바로 나자렛 예수님이 인간으로 육화해 유다인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했듯이, 사막의 무슬림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삶으로 복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성인은 투아레그족의 관습, 전통, 언어를 배우면서 토착민들을 존중했고, 토착민들 역시 성인을 존경했다.

 

토착민들의 친구로 살아간 성인이지만, 성인은 늘 교회 안에서 활동해나갔다.

 

성인은 자신이 머무는 은수처를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 이름 붙이고, 누구나 함께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성체조배를 했다. 아울러 자신 이후에 다른 선교사들이 복음 선포에 함께할 수 있도록 프랑스-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도 해나갔다.

 

성인은 1916년,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혼란하던 중 총에 맞아 선종했지만, 성인의 영성은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성인의 선종 후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20여 개의 영성가족이 생겨나 비그리스도인 안에서, 세속 안에서 관상으로 살아가던 성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2월 12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중)


전 세계서 ‘나자렛 삶’ 살아가는 이들

 

 

- 예수의 작은 형제회 초기 회원들 모습. 예수의 작은 형제회 제공.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생전 홀로 자신의 영성을 살아갔지만, 성인의 선종 이후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따랐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성인의 영성, 바로 나자렛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간다.

 

성인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자렛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인의 모습으로 나자렛의 사람들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만난 것. 성인은 그 영성을 사막에서 가난한 무슬림 원주민들 안에서 실현해나갔다. 이 영성은 당시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선교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그러나 성인은 단순히 무슬림들과 동화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원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교리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영성은 바로 성체조배와 미사를 중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성체가 되도록, 원주민에게 양식이 되도록 했다.

 

1916년 성인은 선종했지만, 이런 성인의 영성은 세계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다. 성인이 선종한지 16년이 흐른 1933년 파리 신학교를 갓 졸업한 5명의 신부들은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파리 몽파르나스 언덕 예수성심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알제리 엘아비옷에 정착해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1899년 성인이 작성한 「회헌규칙 초안」이 그들의 길잡이가 됐다. 5명의 사제들은 예수님의 나자렛 삶을 따르고, 오랜 시간 성체조배를 했으며, 찾아오는 방문객들, 원주민들과 일상을 나누며 형제적 우정을 실현했다. 성인만이 살아냈던 새로운 형태의 생활이 공동체 생활, 수도회로서 형성된 것이다.

 

수도회가 추구하는 ‘나자렛 예수님의 삶’은 형제적 친교 안에서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배와 관상생활을 하는 삶이다. 특히 복음적 가난의 실천, 육체적 노동과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실제적으로 동참하면서 ‘나자렛 예수님의 삶’을 닮아간다.

 

수도회는 2~3명 수도자들이 형제집이라 불리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면서 나자렛 성모님과 함께 신비체인 교회의 사명에 결합한다. 수도회는 무엇보다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시키기보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복음화 된다고 고백한다.

 

수도회의 영성은 사막에만 머물지 않았다. 알제리 엘아비옷의 수도원은 사막생활과 기도생활로 수도자들의 수련소가 됐고, 이 수도자들은 유럽과 중동지방을 시작으로 라틴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때마다 그 지역의 ‘나자렛 삶’으로 자리잡아갔다. 수도자들은 탄광의 광부가, 농촌의 농부가, 어촌의 어부가, 상선의 선원이, 화물트럭 기사가, 서커스단의 잡부가, 윤락가 식당 청소부가 됐고, 집시들과 유랑생활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의 나자렛 삶을 보여줬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2월 19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의 작은 형제회 (하)


노동자로 살며 가난한 이들과 생활

 

 

- 한국관구 수도자들의 모습. 예수의 작은 형제회 제공.

 

 

성 샤를 드 푸코 신부의 나자렛 삶 영성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져나가고 있다.

 

국내에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자리를 잡은 것은 1969년 9월의 일이다. 먼저 국내에서 활동해온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성인의 영성을 따라 한국 수련자 1명이 유럽에서 수련을 받게 됐다. 이어 수도회 본원에서 한국에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 수도자들을 파견했다.

 

수도회가 찾은 나자렛 삶은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노동자로 가난한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들 중의 하나로 사셨던 나자렛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고, 산업현장과 공장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수도회는 셋집에 자리를 잡고 노동자들의 곁에서 생활해 나갔다. 수도회는 한국 땅에서 감실 안에 계신 성체를 중심으로 공동기도를 바치고, 일터에서 노동하며 이웃들과 일상을 나누는 단순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수도회는 어느 나라에 진출하든 2~3명의 수도자가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지역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침으로 삼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매번 도시 재개발 계획에 밀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뿌리 뽑히는 아픔을 나눠야 했다. 산동네에서 변두리로, 월세와 전세를 오가면서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주민들과 거대 건설사 사이의 이권다툼과 갈등으로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는 슬픔을 공유하면서 생활해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도 여러 젊은이들이 함께해나갔다. 젊은이들은 양성기간을 거쳐 노동현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고, 함께 모여 공동생활과 기도를 하고 형제적 우애를 통해 용기와 자존감을 길러 지역교회와 친교를 넓혀나갔다.

 

수도자들은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평등을 실천하고자 했고,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 토착화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왔다. 수도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사회 안에서 또 다른 나자렛 삶을 관상해나가고 있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가난을 넘어 고독과 외로움, 소외와 버려짐, 차별과 집단 따돌림 현상까지 우리 삶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가난한 이들. 수도회는 이들 곁에서 나자렛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 김신관(프란치스코) 수사는 “우리 수도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꼭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면서 “양 냄새가 나는 그들 중의 하나로, 수도자들은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은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 수사는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로서는 유일한 수도회로 우리사회 현실을 반영한다”며 “성소자 감소와 형제들의 노령화라는 현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2월 26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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