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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별별 이야기: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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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4 ㅣ No.1014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2)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상)

 

 

죄의 양상은 크게 생각이나 마음으로 짓는 죄와 말이나 행동으로 짓는 죄로 나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으로 숨겨져 있는 죄보다 행동으로 드러난 죄에 더 초점을 맞춘다. 개인의 내적인 죄는 개인적 의미만을 지니지만, 외적인 죄는 사회와 공동체로 영향력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말과 행동으로 발생한 죄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돼 ‘구조적인 악’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인의 외적인 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로 확산되고 구조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적인 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사회 구조적인 죄와 악에 맞서 대항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이다. 역대 교황님들이 반포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신앙인들이 예언자적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고, 전쟁과 폭력에 맞서 평화와 화해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따라서 교도권이 가르치는 가톨릭 사회교리 안에서 우리는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죄와 악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 짓는 죄가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으로 짓는 죄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나 중요성이 오히려 간과되기 쉽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생각의 죄는 결국 죄의식을 무디게 만들어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방해할 수도 있다. 소죄가 대죄보다 더 위험한 것처럼 마음속 죄가 겉으로 드러난 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근거한다. 죄의 개인 심리학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개인 심리적 차원의 죄와 악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그러나 앞서 설명한 사회 구조적 차원의 가르침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회적 악은 비교적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 숨어있는 심리적 악은 사실 그 본질과 영향력을 명확히 규명해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내적인 죄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즉 교도권의 권위 있는 지침과 기준으로 제시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의 정신적 혹은 심리적 차원의 죄는 전통적으로 영성신학이나 윤리신학과 같은 신학적 관점 안에서만 다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신학적 통찰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신자 중에는 자신의 심리내적인 죄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엠마 자매는 생각으로 짓는 죄로 너무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으로 짓는 죄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죄를 짓고 있다는 죄의식을 동반한 괴로움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네가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면 너는 천국에 갈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계속 섬기겠다고 하면 지옥에 갈 것이다. 너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이냐?” 이 질문에 두려움에 휩싸인 엠마 자매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그 결과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하느님을 배반한 죄의식이 밀려왔다.

 

이와 비슷한 질문은 계속 내면에서 발생했다. “이 두 개의 동아줄 중에 네가 만일 왼쪽 동아줄을 잡으면 너는 살 수 있지만, 저 사람은 죽게 된다. 그러나 오른쪽 동아줄을 잡게 되면 비록 너는 죽게 되지만 저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동아줄을 잡겠느냐?” 그러자 엠마 자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왼쪽 동아줄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의식이 밀려왔다.

 

이렇게 생각으로 짓는 죄로 말미암아 엠마 자매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과연 이 마음속 생각들은 모두 생각으로 짓는 죄인가? 아니면 죄가 될 수 없는가? 만일 죄라면 혹은 죄가 아니라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2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3)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중)

 

 

엠마 자매는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신경증적인 과도한 죄의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엠마 자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엠마 자매에게 있어서는 숨은 것도 다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생각으로 짓는 죄는 그 어떤 행동적인 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드러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중대한 죄의 원천이며 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엠마 자매는 드디어 본당 신부님을 찾아 고해성사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상상은 죄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성사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마음은 한결 편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불안과 죄의식이 밀려왔다. 머리에 떠오르는 상상은 점점 이전보다 더 끔찍한 딜레마 상황들로 펼쳐졌으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단죄의 목소리가 들려와 한순간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믿고 안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이나 교리에서는 생각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 했는데, 신부님은 생각이 죄가 아니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엠마 자매는 해외에서 영성이나 윤리 혹은 성경을 전공하셨다는 박사 신부님들이나 성령이 충만하여 치유나 분별의 은사를 받으셨다는 피정지도 신부님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신부님들도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답변뿐이었다. 자기 생각은 죄가 아니라 망상이라는 말은 더더구나 이해가 안 되었다.

 

엠마 자매는 교회에서 권위를 가진 신부님들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해되지도 않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를 수도 없었다. 자기 생각이 망상이라면 사람들이 생각으로 짓는 죄도 모두 망상이란 말인가? 생각으로 짓는 죄와 망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엠마 자매는 결국 자신이 망상증 환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부님들과는 달리 자신이 망상이 아닌 강박적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엠마 자매에게는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망상이든 강박이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이 왜 죄가 아닌지를 설명해 주지 않는 해석들은 모두 공허했다. 게다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의사가 약을 먹으면 해결된다고 하였지만, 그 역시 말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약을 먹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손과 발을 잘라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약을 먹어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즉 생각으로 죄를 짓고는 있지만,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면-메타인지), 실제적인 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 역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고 보였다.

 

엠마 자매는 결론적으로 자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명확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차라리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신이 치유될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으러 엠마 자매는 상담실을 찾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19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4)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하)

 

 

엠마 자매는 상담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실로 그 인생이 얼마나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는지를 가늠케 해준 고백이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지 하느님 존재와 동일시될 수 없다. 원죄의 결과로 생겨난 인간의 죄에 대한 경향성은 인간의 본성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 경향성을 세례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은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 죄 혹은 죄의 경향성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은 자신의 삶의 목표가 영적 완벽주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벽주의는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실현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엠마 자매는 영적으로 자신이 완벽하다는 스스로의 평가에 위안을 받으며 현실의 그 어려운 고통을 버티어 낼 수 있었다.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은 모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한 삶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그때마다 자신을 이해해 줄 친구나 이웃에 대한 인간적 희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은 알아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냈다.

 

갑자기 하느님이냐 나 자신이냐, 혹은 이웃이냐 나 자신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충만감을 누린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처럼, 이제 자기 생각 안에서도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 질문에서 자신보다는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은 자신의 인간적 약점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의 양심 안에서는 하느님과 이웃보다는 자신을 먼저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 사실은 거짓말로 합리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을 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상상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진실하게 대답하니 하느님과 이웃을 배반하게 되거나 이웃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한 영적인 불완전성이 발생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영적으로 완벽하게 되고 싶은 엠마 자매는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영적으로 불완전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엠마 자매는 영적 지도를 받기 전에 심리치료가 우선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성격적이며 대인 관계적 문제를 영적 완벽주의 안에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했다. 하느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영성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영성을 더 즐겨하신다는 생각의 전환도 필요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삶과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야 했다. 심리치료를 통해 엠마 자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거스르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성당의 한 자매에게 얼굴이 저팔계 같다고 직설적인 말을 했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그 자매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생각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망상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무의식이 뭔가 해결해야 할 내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를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과의 건강한 심리영성적 관계를 회복하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26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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