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교회는 대지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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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회 한 복판에 참여해야 한다(사목헌장 89)."
그러나 그 한복판 곧 중심부는 사회의 세속적 관점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반대되는 최변방에서 찾아야 한다.
즉 또 하나의 다른 중심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는 육적인 세속에 대하여 영적으로 옳게 제 모습으로 제 자리에 설 수 있다.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과 동참은 그리하여 참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존립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참된 교회는 광야, 곧 도시의 끝이나 성문밖 결국 변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온 몸으로 지닐 때 오직 가능하다. 속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눈이 뒤집혀진 그곳에 하느님나라는 열린다. 그리고 눈길과 손길로 낮은 곳으로 향해 있을 때 오히려 교회는 성령강림을 깊게 받는다.
사실 교회는 ’주님의 몸’일지라도 결코 주님 그 자체일 순 없다. 왜냐면 이 세상에 있는 아직은 불완전한 존재인 까닭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히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전위대’요,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여야 한다. 즉 교회는 자신을 하느님나라 인양 할 게 아니라, 다가올 하느님나라의 예표로써 자신을 겸손 되이 나타내며 하느님나라를 몸으로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광야의 외침이어야 한다.
광야는 억압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도정이다. 교회는 광야에 서서 해방을 외치고, 그렇게 해서 해방된 그들을 광야를 통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가나안’과 ’채찍과 억압의 땅 - 애굽’ 사이의 ’땅 - 광야’에 서서 큰소리로 해방을 통한 자유인 출애굽을 외치며 모두가 잠들지 않도록 깨우면서 하느님나라에로 부단히 초대해야 한다.
물론 그 외침은 "깨달아 돌아서서 온전히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오히려 귀막고 눈감고서 잠들려 하는 세상"으로부터 대개 반발을 입을 것이고, 사회의 구조악 역시 대체적으로 보면 그 외침을 통해 회개하거나 고쳐지기는커녕 어쩌면 오히려 더욱 강퍅해져 아이러니컬하게도 악의 강도를 더욱 촉진시키며 그의 실체를 드러내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기까지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외침은 묵살 혹은 외면 당하고 심지어는 박해까지 겪으며, 세례자 요한의 경우처럼 끝내는 빈 들의 헛된 메아리로 헤매다 힘잃고 사라지는 운명에까지 처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의 순간에 설자리를 못 찾아 온 땅을 방황하던 그 외침은 하늘로 사무쳐 올라가 하느님 그분을 움직이고 그분의 주권안에서 그분의 손길로 부활한다. "원수갚을 것은 내 할 일이니 내게 맡겨라"했던가. 그리하여 모든 외침이 철벽같은 그 성벽에 부딪혀 죽고, 아무 외침의 소리도 사라져 들리지 않는 공허의 땅 그 위로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하느님의 손길이 비로소 내려온다.
그렇게 교회는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그를 향해 온전히 썩혀지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밀알 하나가 맺을 백 배, 천 배의 그 결실을 자신이 ’지금 바로 여기’서 품으려 해선 안된다. 거짓 부활을 즐기려 들어선 곤란하다.
백 배, 천 배의 결실 그것은 진정 ’남의 몫’이다! 마치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느보산 봉우리에 올라가 앉아서 ’최후의 노래’를 부르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 해방자 모세처럼 교회 역시 그렇게 달콤한 결실은 맛볼 수 없는 운명이다.
사실 거인(巨人) 모세는 대지(大地)였다! 생명들을 품고 있는 대지는 언제나 생명들에 의해 마구 짓밟히거나 무슨 퇴비라도 되는양 내내 썩혀 냄새가 나고, 새끼들을 키우는 사랑 넘친 에미는 고놈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단 것을 맛볼 수도 없고 고놈들을 감싸기 위해 고운 옷을 입을 여유도 없지만, 그러나 그를 통해 꽃은 아름답게 활짝 피어 나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귀엽게 자라나고 뭇 생명들은 참된 힘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대지와 에미 역시 초월적 풍요로움을 반드시 입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진실로 부활의 영광을 입는 때란 오직 바로 그 순간이다! 1 56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