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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59: 프리드리히 스팀멜의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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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9 ㅣ No.1462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9) 프리드리히 스팀멜의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


‘보편적 인권’이라는 새로운 길로 교회를 이끌다

 

 

- 프리드리히 스팀멜,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1903년), 케벨라 순례성지, 독일.

 

 

1800년대 유럽 사회는 ‘혁명’과 ‘발전’이라는 키워드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 여파로 인한 자유와 독립의 움직임도 거세게 일어난 동시에 거기에 편승하지 못한 계층의 비참함도 극명하게 드러난 시대였다. 교회는 영적ㆍ물리적인 박해를 거쳐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고, 교종(敎宗)은 영적 차원의 리더십을 보편적으로 확보하는 가운데 세계를 대상으로 모든 백성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혁명과 발전의 시대, 레오 13세 교황

 

1878년 2월 로마 인근 카르피네토 로마노 교구 출신의 조아키노 빈첸초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 추기경이 ‘레오 13세’라는 이름으로 교종이 됐다. 로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고, 인문학을 기반으로 외교와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뒤, 사제품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특사로 베네벤토, 스폴레토, 페루지아 등 저물어 가는 교황 영지에서 지방 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부정부패와 끈질기게 싸웠고, 마피아와 내통하며 백성의 피를 빨며 지역 경제를 쇠퇴시키고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또 여러 방식으로 빈민 구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집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주택을 공급하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낮은 이율의 대출을 지원하며,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등 사제로서 행정관으로서 할 일을 소신껏 해 나갔다. 그것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된 뒤에도 계속됐다.

 

그가 교종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탈리아 통일은 이미 완성됐고 교황령은 모두 사라졌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됐고, 교종은 바티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통일 이탈리아는 이제 수 세기 동안의 지역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어떻게 고취해 나가느냐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고, 그것을 위해 교회가 필요한 만큼 여러 구실을 만들어 교종을 압박했다. 레오 13세는 이탈리아 혁명 세력의 입맛에 맞추기보다는 세계와 인류 앞에서 교회의 길을 내는 데 집중했다.

 

 

노동 계층을 향한 관심, 회칙 「새로운 사태」

 

레오 13세는 임기 초부터 안으로는 훼손된 교회를 복원하고, 밖으로는 이탈리아를 초월해 교회와 현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노력했다. 계몽주의 물결 속에서 일었던 과학과 종교의 대척 관계에 대해 그는 두 세계의 공존을 설파했고, 성경 연구와 토미즘에 관한 연구를 촉진하는 한편 연구자에게만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개방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통한 마리아 신심을 확산시키고, 성 요셉과 미카엘 대천사,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독려했다.

 

그는 신학에서나 정치에서나 온건주의자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럽인들의 삶의 중심에 두게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가진 지성과 외교적인 자질을 최대한 발휘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가톨릭 신앙과 교구장 임명에 있어 교회의 권리를 되찾아왔다. 국제 사회에서 교황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었으며, 당시 유럽을 휩쓸던 각종 사조에 어떤 식으로든 응답함으로써 교회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의 이런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노동자 계층을 향한 관심과 처음으로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언급한 교종이었다는 사실이다. 1891년에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는 당대 유럽 사회의 다양한 문제, 특히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약자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본주의는 탄생과 함께 부(富)의 분배 문제를 가져왔고, 그 결과 양극화는 필연적이었다. 이에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 원칙으로 기본권과 사회정의, 공동선을 외쳤다. 당시 사회 상황은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사태들’이었고, 교종은 이 모든 일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가 개척한 길은 오늘날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정의 문제, 세계적으로 만연한 각종 빈곤의 양상과 그것의 격차 문제, 인권과 다양한 차별 문제, 폭력과 전쟁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문제에서 교회가 가야 할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화 전문 예술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프란즈 마리아 스팀멜(Friedrich Franz Maria Stummel, 1850~1919)이 독일의 케벨라(Kevelaer) 순례 성지에 그린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1903년)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03년 9월, 예수회에서 출판하는 프라이부르크 인 브리스고비아(Friburgo in Brisgovia)의 월간 「가톨릭 선교(Die katholischen Missionen)」의 도메인으로 소개됐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며 작가 안톤 후온더(Anton Huonder, 1858~1926)였다.

 

스팀멜은 뮌스터에서 태어나 대성당 부설 학교에 다니며, 인문학을 공부하던 중,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 조기 진학했다. 나자렛 운동을 활발히 했고, 그 바람에 성화 전문 예술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은 성화 외에도 유리화, 조각, 금과 청동 세공 및 직조와 자수 등 장인들이 하던 다양한 분야까지 광범위했다. 이후 12년간 에른스트 디거(Ernst Deger)와 에두아르드 폰 게브하르트(Eduard von Gebhardt) 밑에서 미술 공부에 전념했다. 1879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많은 성당에 작품을 남겼다. 1881년 케벨라를 시작으로 안홀트, 퀼른, 룩셈부르크, 펠플린, 1906년 베를린까지 수많은 성당에 작품을 남겼다.

 

32살이 되던 1882년에 스팀멜은 순례 도시인 케벨라로 이사해 가장으로 부모 형제들을 돌보다가 거기서 1890년 헬레네 폰 윙클러(Helene von Winkler, 1867~1937)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낳았다. 1919년 스팀멜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간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레오 13세와 단테, 베르길리우스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로, 레오 13세가 가장 좋아한 시인이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였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과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를 모두 읽었으리라는 건 당연하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도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의 안내자로 당대에 활동하던 시인이 아니라 베르길리우스를 삼았다. 그가 천국의 안내자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 로마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옥’까지만 안내하고 림보로 돌아가야 했다. 천국의 안내자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한 그가 연모한 여인 베아트리체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모델을 현실에서 찾았다. 실제로 현실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대부분 사람은 현실을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단테 역시 그랬다. 그가 바라본 현실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의인을 찾아보기 드문 삭막하고 피폐한 공간이었다. 적나라한 그런 현실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속어로 폭로했고, 그것을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는 그림으로(1822년), 구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는 판화(1861년)로 1800년대 사회상으로 빗대어 남겼다.

 

 

그림 속으로

 

스팀멜은 단테와 관련한 이런 작품들과 레오 13세의 연관성을 이 작품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교회’는 미술사에서 언제나 ‘배’ 혹은 ‘방주’로 표현됐다. 성당의 제단을 표현한 듯 양쪽에 우뚝 세운 기둥 안에는 네 개의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왼쪽부터 첫 번째 칸에는 ‘성 요셉의 작은 배’라고 적힌 갑판 위에 천사가 지키고 있다. 그 앞에 앉은 성녀로 보이는 두 여성은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는 반인반수의 존재들을 보면서 손을 꼭 잡고 있다. ‘교회의 수호성인, 성 베드로’라고 적힌 두 번째 칸에는 교회의 지킴이들이 있다. 작대기 모양의 노를 젓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영성가들로,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는 반인반수의 존재들을 밀어내고 있다. 세 번째 ‘유혹자들을 막는 영적 군대’는 십자가로 무장하고 있다. 유혹자들은 바다로 표현된 세상에서만 오지 않는다. 위에서도 검은 새가 이들을 위협한다. 네 번째 “인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한 손은 배의 키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있는 레오 13세 교종이 있다. 그는 왕직, 예언직, 사제직을 표현하는 삼중관을 쓰고 험한 세상을 건너는 교회(방주)를 인도하고 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함께 하고, 바다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동물들이 우글대고 있다. 당시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스팀멜은 특유의 화법으로 표현했다고 하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7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 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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