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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회는 왜 가난한 이들을 우선 돌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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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회는 왜 가난한 이들을 우선 돌보나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은 하느님 영광 드러나는 ‘성전’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무료 진료소가 설치된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해 무료 진료를 받은 한 노숙인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CNS 자료 사진]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인 15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정한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가난을 묵상하고, 기도와 행동으로 가난한 이를 만나 사랑을 실천하고,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과 연대를 호소한다.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일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현대 세계의 가난은 고통, 소외, 억압, 폭력, 고문과 옥살이, 전쟁, 자유와 존엄의 박탈, 무지와 문맹, 응급 의료 상황과 일자리 부족, 인신매매와 노예살이, 망명, 극빈과 강제 이주, 노동 착취, 사회 불평등, 도덕적 타락, 대중의 무관심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왜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지를 알아본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선택하셨다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몸소 사람이 되시어 가난하게 사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애정과 호의를 보여 주시지만, 소외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특별하게 대하셔서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작은 이들”(마태 18,10)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을 누리도록 그들을 먼저 들어 올리시고자 하셨다.(마태 5,3 참조)
이처럼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선택하셨다. 아울러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다. 너희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는 말씀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봄이 ‘구원의 선택 기준’임을 제시하셨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라고 고백했다.
주님께서 제시한 구원의 선택 기준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관심, 배려와 돌봄은 참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지, 구원받을 사람인지 식별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늘 환대하고 도와줄 때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대하듯이 하는 것이다.
가난한 주님
네 복음서 특히 루카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분이셨음을 드러낸다. 엄동설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구유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또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고 치유의 기적을 보이셨고, 모든 것을 빼앗겨 알몸인 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처럼 주님은 탁월하게 가난하신 분이셨다.
가난한 분이신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길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가난을 그리스도인 가난의 모범으로 여겼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고 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난한 이와의 연대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행하셨던 자비와 용서, 가난과 섬김, 개방과 충실함의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첫걸음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이 실천했던 가난한 이와의 연대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성전’으로 여겼다. 이곳은 가까이 계시는 주님의 놀라운 빛(1베드 2,9)이 발산되는 거룩한 곳이다. 그래서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라고 고백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보물로 여겨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5)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권고하며 무엇보다 주님을 따르는 소명을 가난을 통해 실천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1-35)
이처럼 초기부터 도움과 나눔에 대한 교회의 헌신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칭송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따르도록 이끌어 왔다. 그 가운데 늘 변치 않는 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는 데에 있다.(갈라 2,10)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와 비참」 교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조건 없는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은총을, 자비로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우리가 의지와 감정을 모두 바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황은 “우리가 역사를 바꾸고 진정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듣고 그들을 소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의 중심에는 항상 ‘기도’가 차지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이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우리 생활의 기본 요구들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의식주를 청하는 기도로 응답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의 기도로써 서로를 받아들이는 기쁨을 누리려면, 온갖 형태의 이기심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둘째, 물질적 재화가 재분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이윤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모든 행태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쓰고 버리는 물건들, 소비주의, 지칠 줄 모르는 재산 소유, 환경 자원의 낭비 앞에서 침묵해선 안 된다. 아울러 민족들을 노예화하고 모든 나라를 수렁으로 끌고 가는 몇몇 경제적 선택에 직면할 때 침묵해선 안 된다.
셋째, 돈과 경력과 사치를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데서 벗어나게 해 주는 ‘회심’이 필요하다. 가난은, 우리 피조물의 한계와 죄악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전능하고 불멸하는 존재로 느끼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가난은 우리가 물질의 올바른 사용에 가치를 둘 수 있게 해 주고, 이기적이고 소유하려 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척도가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45항 참조).
넷째, 연대와 형제애의 구체적 징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분명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단지 따뜻한 식사나 빵 한 쪽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하다. 또한, 다시금 따스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동행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5일, 리길재 기자] 0 1,45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