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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코스트 요한 신부 서한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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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6 ㅣ No.1636

[서평] 『코스트 요한 신부 서한집』 서평

 

 

1. 당가 선교사 코스트 신부

 

선교사의 꿈은 무엇일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 15)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땅끝까지 가서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리라. 하지만 이런 바람이 모든 선교사에게 현실화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시대 상황이, 때로는 주어진 직책이 자기 바람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한집의 주인공 코스트 신부가 그런 선교사 중 한 분이었다. 누구보다도 선교지에서 발로 뛰며 복음을 선포하고 싶어 했으나 평생을 ‘후방’에서 다른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당가(當家)의 삶이었다. 예전에는 이 말을 흔하게 썼다. 당가 신부, 당가 수녀, 교구 당가 등. 한 집안 혹은 공동체의 살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당가는 고전적 의미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코스트 신부는 거의 한 생애를 파리외방전교회의 아시아 대표부와 조선대목구에서 당가로서, 혹은 당가와 같은 직책을 맡으며 살았다.

 

184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으젠느 장 조르주 코스트(Eugène-JeanGeorge Coste)는 아시아 선교의 꿈을 안고 1866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1868년 6월 6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7월에 프랑스를 떠나 아시아 선교의 교두보인 홍콩 대표부에 도착했다. 그의 온화한 성품과 정확한 일 처리가 눈에 띄어 그는 대표부에서 8년간 일하였다. 이어 싱가포르 대표부, 다시 홍콩 대표부를 거쳤고 1874년 상해 대표부의 당가 신부가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대표부는 아시아 교회 전체의 정보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는 대표부에서 일하는 동안 조선에서 발생한 병인박해(1866~1873) 소식을 들었고, 조선에서 탈출한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런 소식들과 만남은 그의 선교 열정을 자극했고, 마침내 그는 상해 대표부에서 일하는 동안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가장 어려운 선교지인 조선을 향해 가고 싶어 선택했으나 그를 기다리는 건 계속되는 당가 신부의 삶이었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1875년부터 10년간 그는 조선 교회를 위한 해외 거점이 있는 중국 요동의 차쿠에서, 이어 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가사키에서 활동하였다. 1885년 마침내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그에게 맡겨진 직무는 명동 성당 건축과 인쇄소 설립과 운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명동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896년 2월 28일 선종하였다.

 

이 서한집에는 그가 당가 신부로 활동하면서 주고받은 서한들과 자료들이 담겨 있다. 당가는 담당 선교지의 선교사들을 지원하면서 대외 업무를 총괄한다. 따라서 그가 주고받은 서한과 자료에는 조선 교회의 사정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와의 관계, 조선과 관련한 외교 현안들이 담겨 있다. 코스트 신부는, 조선 정부가 그간의 쇄국에서 벗어나 개항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해외의 외교 현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변화하는 모습의 또 다른 측면을 이 서한집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코스트 신부는 때로는 관찰자, 때로는 조언자의 역할을 하며 특별하고 고유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2. 중국에서 주고받은 서한(1876~1877)

 

이 책의 제목은 『코스트 요한 신부 서한집』이지만 그가 주고받은 모든 서한이 아니라 조선과 관련이 있는 서한만을 담고 있다. 코스트 신부가 주고받은 편지는 시기, 주제, 장소별로 다양한데 이 책에는 그가 조선 선교사가 된 1876년 이후의 서한과 관련 자료만 실려있다. 그가 사적으로 주고받은 서한이나 조선 교회와 관련 없는 서한들은 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책에 나오는 첫 서한은 1876년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가 상해 대표부에 있는 코스트 신부에게 보낸 친서이다. 조선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신임 선교사에게 장상으로서의 당부와 준비 사항을 일별한 내용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9명의 선교사가 순교하고, 리델 신부를 포함한 세 명이 중국으로 탈출한 이후에 조선에는 선교사가 없었다. 그동안 리델은 주교가 되어 조선대목구장이 되었고, 조선 교회의 해외 거점인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 눈의 성모 성당)을 요동 차쿠에 마련하였다. 1876년 코스트 신부는 조선 입국을 위해 차쿠로 갔으나 그에게 맡겨진 일은 조선어 문법서와 조선어-프랑스어 사전의 편찬이었다. 누군가는 조선대목구를 후방에서 지원하며 신임 선교사들을 준비시키고, 조선 교회를 위한 대외활동을 총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조선이 개항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다. 이는 역설적이게 코스트 신부의 조선 입국을 더욱 지연시켰다. 차쿠에 있는 조선 교회의 거점을 일본으로 옮겨야 했고, 그 일의 담당자가 코스트 신부였기 때문이다.

 

 

3. 일본에서 주고받은 서한(1878~1884)

 

1878년 해외 거점을 일본으로 옮긴 코스트 신부는 이전의 일들을 계속하였다. 조선어-프랑스어 사전의 편찬은 속도를 내었다. 인쇄소를 설립하고 조선어 활판을 만들어 마침내 1880년에 『한불자전』이 출판되었다. 이 서한집에 나타나는 사전 편찬의 과정은 흥미롭다.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 대를 물려가며 손으로 써서 집대성한 자료들을,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과 함께 활자를 주조하여 사전을 출판하고 판매하는 과정은 잔잔하면서도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비록 조선인의 참여 부분이 간략한 서술과 행간을 통해서 확인되는 바이지만 짤막함 속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한불자전』 편찬은 조선 교회를 위한 기도서와 교리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1882년 코스트 신부는 나가사키에서 새로이 한글 활자를 주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천주 성교 공과』, 『신명 초행』, 『영세 대의』, 『성찰 기략』, 『회죄직지』, 『성교 요리 문답』 등이 줄을 이어 출판되었다. 코스트 신부는 선교 현장에 나가지 못했지만 그의 책들은 조선 선교지에서 가장 요긴한 도구로 쓰였다. 한글책과 관련한 그의 활동은 선교사의 일이 현장에만 있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코스트 신부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조불조약의 비준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조약은 1886년에 이르러 체결되었지만 이미 4년 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스트 신부는 프랑스 측 대표 디용(Dillon)에 의해 협상을 위한 조선어 통역관으로 지목되었다. 이때 코스트 신부는 협상문 초안에, 프랑스인이 조선에서 ‘도덕’을 ‘가르칠’ 수 있다는 항목을 넣자고 제안하였다. 이는 후일 조약체결 과정에서 ‘교회’(教誨)라는 말로 삽입되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천주교를 극도로 경계하던 조선의 대표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는 이 표현의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종 임금의 재가를 따로 받아야 할 정도로 민감했던 이 표현이 코스트 신부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이 서한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코스트 신부가 주고받은 서한과 자료에는 흥미를 끄는 내용이 사이사이에 단편으로 담겨 있다. 아직 조불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는데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떻게 일본 배를 타고 조선을 오갔을까? 조선 연안에 이르러 몰래 잠입하거나, 반대의 경우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몰래 오르는 방식이었다. 같은 방법으로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는 조선인 신학생들이 일본을 경유했다.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코스트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라틴어를 배우며 떠날 준비를 하였다. 조선 교회의 소식을 전하러 오가는 조선인들,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를 편찬하기 위해 오간 조선인들, 갈매못 순교자들의 유해를 나가사키로 모셔온 연로한 조선인, 그리고 조선 신자들에게 한문 첨례표와 중국 담뱃대 등을 챙겨주는 코스트 신부의 모습. 이러한 내용은 짧은 단편으로 등장함에도 이 서한집을 생동감 있게 한다.

 

 

4. 조선에서 주고받은 서한(1885~1896)

 

1885년 11월 코스트 신부는 드디어 조선에 입국했다. “십 년의 배회 끝에 마침내 이곳, 이 소중한 조선에 제가 있습니다.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1885년 12월 15일 서한)라는 편지에 그간의 심정이 담겨 있다. 26세에 사제가 되어 선교사의 꿈을 안고 프랑스를 떠난 그는 43세가 되어서야 그토록 바라던 선교지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선종할 때까지 11년간 주고받은 서한에는 개항기의 조선 교회와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내용은 교안(教案) 관련 서한과 자료이다. 신앙의 자유가 점차 가시화되는 시점이기에 천주교 신자들과 비신자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빈번하였다. 어찌 보면 단순한 국내 문제가 프랑스 선교사와 관련이 되어 외교적 문제로 발전한 사안을 교안이라 하는데,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고위 성직자의 중재가 필요했다. 코스트 신부는 1886년부터 조선대목구의 부주교(副主教)였다. 박해 속에 성장한 조선 교회는 언제든 대목구장 주교를 대신할 신부를 직무 대리로 임명하였고, 그를 ‘부주교’라고 불렀다. 대목구장 주교를 보좌하고, 대목구장이 부재중이거나 사망(혹은 순교)할 경우 공백없이 교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교안 해결의 상당 부분은 부주교인 코스트 신부의 몫이었다.

 

이 시기의 서한집에서 교안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내용은 건축과 관련되어 있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코스트 신부는 홍콩 대표부에서 일할 때부터 몇몇 건물을 지었다. 아직 이렇다 할 성당 건물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조선 교회에 그의 존재는 큰 선물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선교 현장으로 가지 못하고 1896년 숨을 거둘 때까지 서울에서 건축을 담당하였다. 명동 주교관을 필두로 하여 조선의 첫 번째 성전인 약현 성당, 샬트르 수녀원 등 여러 건물을 신축 혹은 증축하였다. 그가 한 건축의 백미는 종현(명동) 성당이었다. 이 서한집을 보면, 그는 건축만 한 것이 아니라 부지 조성은 물론 각종 분쟁 해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책임졌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 필요한 벽돌공들을 중국에서 데려오는 일도 그의 몫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으나 명동 성당 건축의 주역이 코스트 신부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여러 건축 일과 더불어 그는 일본에서 줄곧 담당하던 인쇄소를 서울로 이전하는 일도 맡았다.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를 출판하여 보급하는 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조선 교회에서 그의 직함은 부주교였으나 홍콩 대표부에서부터 그가 줄곧 해오던 역할은, 집안일을 책임지고 돌보는 당가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평생 한결같은 일을 계속하던 코스트 신부는 1896년 2월 28일 54세의 나이로 “성교회의 성사들을 받으며 서울에서 선종”했다. 그의 죽음과 장례를 보여주는 뮈텔 문서들(서한집 340쪽 이하에 첨부됨)은 공문서 형식의 건조한 문건이지만 절제된 감동을 준다. 코스트 신부는 비록 자신이 원하던 현장 사목을 거의 하지 못했으나 선교지에서 죽는 행복을 누렸다. 선교사의 소망 중 하나는 자신의 선교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계속되는 선교 여정

 

선교사로서 코스트 신부의 사명은 19세기 말 조선에서 마무리된 것일까? 그가 남긴 유형, 무형의 유산들은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적인 예로 그가 건축한 명동 성당은 서울을 찾는 국내, 국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명물이다. 그간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번에 출판된 서한들 역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그의 유산 중 하나이다.

 

아시아 선교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지에서 생성된 기록들을 자신들의 신학교 문서고에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흔히 ‘AMEP’라고 표기하는 옛 선교사들의 기록물 중에서 AMEP Vol. 577~582, 그리고 H 1~15, BH 시리즈는 조선과 관련되어 있다. 이번에 발행된 서한집은 AMEP Vol. 580, 581에서 코스트 신부와 관련이 있는 서한과 자료를 번역하여 엮은 책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분의 노고가 있었다. 가장 큰 수고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기록들을 보존하고, 그것을 아낌없이 공개한 파리외방전교회이다. 이 기록물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한국으로 입수되었는데, 각기 다른 선교사들의 다양한 수기여서 프랑스어에 능통한 전문가들의 판독을 거치지 않으면 이용이 곤란하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AMEP Vol. 580, Corée 1875-1886’과 ‘Vol. 581, Corée 1887-1900’은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일차로 판독했고, Vol. 580은 요셉 루엘랑(Joseph Ruellen) 신부, Vol. 581은 서봉세(Gilbert Poncet) 신부가 감수하여 쉽게 볼 수 있는 문서로 거듭났다.

 

한글 번역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연숙진 선생(한국천주교주교회의)이 맡았다. 주석과 해제까지 작성하였으므로 더 큰 노고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서들을 담당하며 관련 번역을 해왔기에 이 서한집에 담긴 주석과 해제에 그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교정, 교열, 편집, 그리고 내용 감수를 거쳐 이 책이 출판되었다. 모든 과정을 보며 선교사의 활동은 당대에 끝나는 과거의 무엇이 아님을 실감한다. 선교 활동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라는 관용구는 공간을 넘어 시간을 함께 아우르는 표현임을 이 서한집을 통해 확인한다.

 

[교회사 연구 제62집, 2023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환(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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