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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보기: 떠나야 하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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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보기] 떠나야 하는 사람들
본인의 뜻과는 달리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버린 경우입니다.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민, 강제 이주민,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크게는 전쟁이나 내란으로 살 수가 없어 몸을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제적 궁핍을 피하기 위해서 떠나기도 합니다. 살던 곳에서의 갈등으로 내쫓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치공동체(국가)의 정책에 따라 내몰리기도 합니다.
살 곳을 새롭게 찾아서 떠나는 이들은 고통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 산을 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생 끝에 닿은 곳에서도 환영받을 리 없습니다. 이주민 난민의 문제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된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입장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방인이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손해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치고야 맙니다.
크게는 세계적인 문제이고 작게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창 국토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댐을 건설하여 물을 막아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경상북도 청도군에는 운문댐이 있습니다. 태백산 광산지역과 대구광역시의 주변 도시에 생활용수를 대기 위한 댐입니다. 운문면 대천리 등 7개 마을이 수몰되어 3천여 명에 달하는 지역주민들이 이주를 해야 했습니다.
“운문면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 주민들은 캄캄한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이고, 사막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미물이 되고 말았다는 데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96년에 댐이 완공되었고, 91년부터 이주를 시작했으니 그 시절의 일도 다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향을 떠난 3천여 명에게는 그 근본까지 잃어버린 뼈아픈 슬픔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규모 국가사업에 의해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발전소, 핵폐기장, 송전탑 등의 공사로 인해 떠나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국가 시설 정비라는 이름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두물머리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수변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났습니다. 유기농산물을 생산하며 끝까지 남았던 농민들도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떠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서든지 받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힘이 있습니다. 이주민은 사회적 약자인 것입니다.
환대하고, 보호하고, 증진하고, 통합하는 것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34). 2018년 제104차 세계 이민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담화문에 인용하신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교황께서는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람페두사라는 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 온 이태리 최남단의 작은 섬입니다. 인구 5000명의 작은 섬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분쟁으로 살기 어려운 이들이 유럽을 향하는 길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교황의 관심은 이주민을 떠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이주민들을 잘 대해줄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담화문에서는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네 동사를 통하여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곧 환대하고, 보호하고, 증진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환대하기는 이민들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목표한 국가에 들어가도록 돕는 절차입니다. 비자를 쉽게 발급하고, 개인적 공동체적 후원 프로그램을 채택해 특별히 취약한 난민들을 위해 살아갈 길을 마련하는 인도주의적 통로를 개설하기를 촉구합니다.
추방이 아니라 환대 프로그램을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국가 안보보다 개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라는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뜻을 전하며 이들의 안전과 기본 서비스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합니다.
두 번째 동사 보호하기는 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이민과 난민의 권리와 존엄성 보호를 위한 일입니다.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길을 떠나는 순간 보호는 없었습니다. 아주 작은 아이들의 시신이 바닷가에 밀려오는 모습은 모든 세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보호는 출신국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안전하게 출발하고 이주한 나라에서 신분증을 직접 소지하고 공정한 사법권에 접근하며 영사관의 지원을 받고 생계를 위한 보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민들이 자신의 존엄에 대한 존중으로 도착국에서 이동의 자유, 취업 기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한 접근 기회를 제공받는 것입니다.
또한 국적을 가질 보편적 권리가 인정되어 모든 아동이 출생 때 마땅히 국적을 인정받아 무국적 상태로 머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귀한 사람들이 거부당하고, 배척당해서는 안 돼
증진하기는 본질적으로 모든 이민과 난민이, 창조주의 뜻대로 인간을 이루는 모든 차원에서 자신을 환대하는 공동체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권리를 부여받았음을 보장하라는 요청입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남의 장막을 짓고 하느님을 경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그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 재능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민과 난민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고 지닌 능력을 적절히 인정받고 그 가치를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지 않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동사 통합하기는 이민과 난민의 존재로 생겨나는 문화 간 상호 풍요로움을 위한 기회에 관한 것입니다. 통합은 난민과 이민들이 도착국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잘 반영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함으로써 비록 다른 땅에 뿌리는 내렸지만 그 고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또 다시 자신의 둥지를 얻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삶입니다. 누구도 그 자리를 침해받지 않는 것, 삶의 자리를 건드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피할 수 없는 이유로 훼손당한다면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네 인간은 모두 살도록, 이 아름다운 공동의 보금자리인 이 땅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창조의 귀한 사람들이 거부당하고, 배척당하고, 내몰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결혼 이주민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역시 그분들을 외지인,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그분들을 환대하고 보호하고 증진하고 통합하기는커녕 차별하고 외면하고 낙인찍어 대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의 이웃입니다. 상처를 입은 여행자를 싸매주고 치료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대목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이방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기회입니다”(2018년 제 104차 세계 이민의 날 담화 중).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7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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