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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보기: 평화로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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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보기] 평화로 가는 길!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른바 4월 위기설, 코피 작전 등으로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정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미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사상자 오백만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연일 계속되는 북한과 미국의 강경한 발언에 두려움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란 없는 것일까? 분단국가에서는 사치스러운 바람일까? 자문해보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라며 한탄하시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와 내 이웃 그리고 또 다른 시민들도 평화를 갈망하며 살아가는데, 그리고 북녘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도 모두 평화를 원할 텐데, 어찌 우리의 운명은 이다지도 암담한가를 생각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고뇌의 순간들을 보냈습니다.
암흑 한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핵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미국을 꼭 붙잡고 사정을 해서라도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진정 평화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이루기를 원하는 시민들의 마음과 마음이 모아져 드디어 지난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으며 남과 북이 손을 잡고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자는 감격스러운 합의였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는 판문점에서의 하루는 마치 한편의 대서사극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할을 맡아 끊임없이 연습을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무대에 설 수 있는 연극이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되고 때가 되어서 이루어진 선언이 아니라 선언문의 한 글자 한 글자에는 그동안 평화를 염원했던 남과 북의 구성원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토록 절절한 사연들이 모여서 비로소 물꼬를 트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평화입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리듯이 끊기면 그대로 굶게 되는, 멈추어서는 안 되는 ‘평화이루기’입니다.
교회는 평화를 갈망하는 공동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4월25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일반알현을 마무리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는 금요일, 4월27일에는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입니다. 두 정상의 만남은 투명한 대화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화해와 되찾은 형제애를 바탕으로, 마침내 한반도의 평화와 전 세계의 평화를 보장하는 구체적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평화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에게, 저의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온 교회가 곁에서 동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성좌는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남북의 만남과 우정으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유용하고 진실된 발걸음에 함께하며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지니신 분들에게, 평화의 ‘장인’으로서 희망이라는 용기를 지니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모든 이의 선을 위해 시작한 이 여정을, 신뢰를 지니고 추진해 나가기를 권고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고, 평화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남한과 북한에 사는 모든 한국인을 위한 기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교회는 이처럼 평화를 갈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평화의 공동체인 교회는 교황 바오로6세의 제정으로 1968년부터 매년 새해 첫 날을 ‘세계 평화의 날’로 지내며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기도해왔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인간의 계획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의 근본 속성이다.”는 간추린 사회교리 488항의 가르침과 같이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근본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먼저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직무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평화의 선포로 시작되어 형제자매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혈육 사이에 피를 보고야 만 카인과 아벨의 슬픈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68년 전에 일어났고 그 전쟁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종전이 아닌 휴전인 상태로 말입니다.
그 후로 수많은 화해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도 갈라진 채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공동체인 교회가 보기에 한반도는 분단의 아픔을 살고 있는 자체로 비구원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그대로 보고 있지만은 않으십니다. 또 다시 처음처럼 평화의 길로,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사회교리 안에서 평화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라고 합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모든 차원의 균형에 대한 존중으로 이해된다. 평화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지 못할 때,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지 못하고 시민 생활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을 때 위협을 받는다. 인권 수호와 증진은 평화로운 사회 건설과 개인과 민족과 국가의 완전한 발전에 본질적인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
또한 “평화는 사랑의 열매이다. 참되고 지속적인 사랑은 정의의 열매라기보다는 사랑의 열매이다. 정의의 역할은 단지 모욕을 가하거나 손해를 입히는 것 같은 평화의 장애물을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 그 자체는 사랑의 행의이며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그러므로 평화는 단지 평온한 상태,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정의롭지 못한 모든 처지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경쟁사회,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스로나 이웃을 돌볼 여유도 없이 도무지 내일이란 없는, 하루만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이웃들의 이야기들이 떠오르고 지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로 나뉘고, 배운 이와 못 배운 이가 나뉘고,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이 나뉘고, 약자와 강자로 나뉘는 세상에서 평화를 키워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을 귀한 하느님의 자녀로 여길 때, 그래서 그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감춰지지 않을 때 평화는 시작합니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평화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늘 간절히 기도하시니 말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6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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