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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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아브라함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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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41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의 시련에서 우리는 생명의 시련을 본다. 아브라함의 불임은 생명의 불임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생명이 생명을 낳지 못하는 것보다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아브라함의 삶은 바로 생명을 찾아 나서는 탈출의 여정이었다. 그 고단한 삶을 떠받치는 힘은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 하겠다”(창세 12,2)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

 

아브람이 큰 흉년 때문에 이집트로 잠시 몸을 피했을 때, 아름다운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창세 20,12 이복 남매와 비교) 속인 것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약속의 절대성 때문에 도덕적 모순은 배후에 가려진다. 아브라함 역시 무모한 정직보다 임시방편의 거짓말을 선택한다.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약속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후손을 얻기 위해 살아온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모든 고난에서 피어난 웃음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소중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다(창세 22,2 참조). 그분은 처음부터 이사악을 지칭하지 않고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이라고 에둘러 표현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더없이 소중한데, 그 외동의 운명은 대개 고난과 관련된다.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이사악의 운명이 그러하고, 판관 입타의 무모한 맹세로 희생된 그의 외동딸의 운명이 그러하다(판관 11,34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르 1,11)에도 고난받는 외아들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왜 항의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하느님께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공동번역 창세 18,25)라고 항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부당한 요구에는 왜 항변하지 않을까? 물론 그 두 가지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상황을 전제한다. 하나는 제물로 봉헌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의 처벌에 관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살인 혐의 없이 살해가 의식(儀式)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사악의 제헌은 가나안 사람들이 벤 힌놈의 골짜기에서 바알 신에게 자식을 불살라 번제로 바치던 풍습(예레 19,5-6 참조)을 반영하는 것일까?

 

에제키엘 역시 제 속에서 나온 첫 새끼까지 우상 제물로 바쳤다(에제 20,25-26 참조)고 당대의 풍습을 비난했다. 그러나 탈출기는 “첫 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2)고 하면서 맏아들 제헌의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가? 더욱이 2역대 33,6에 의하면 유다의 임금 므나쎄는 벤 힌놈 골짜기에서 왕자들을 불살라 바쳤다. 이 모든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떠나가고 없는 상황에서 외아들로서 맏아들이 된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제의적 요구에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던 것은 아닐까? 성경 본문은 이 점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이사악의 제헌을 명령하시는 하느님과 이의 없이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순종만 강조할 뿐이다.

 

모리야 산으로 향하는 사흘의 긴 침묵을 깨고 이사악이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느님께서 양을 따로 준비해 두셨으리라고 확신했을까?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일종의 연기란 말인가? 만일 아들이 번제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마치고 아들과 함께 걷는다(창세 22,8 참조). 라삐들은 ‘함께 걸었다’는 표현에서 이사악이 아버지의 말씀에 동감하고 순종의 길을 함께 걸어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사악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질만큼 장성했기에 그에게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사악은 당시에 37세였다고 한다. 창세 23,1에서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아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떠나간 뒤 그 슬픔에 못 이겨 죽게 되었다고 한다. <미드라쉬>는 사라가 90세에 이사악을 얻었으므로 이사악은 사라가 죽던 해에 37세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헌은 이사악의 자발적 동의로 이루어진 이사악의 자기 제헌으로 해석되었다. 더욱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에 올려놓을 때 장성한 아들 이사악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본시 번제물에 쓸 동물을 잡을 때 묶지 않고 직접 칼로 도살하는데 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묶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 행하는 고유한 예식이었을까?

 

<미드라쉬 랍바>(56,8)에 의하면, 이사악이 “아버지, 나는 아직 젊기 때문에 칼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 몸이 부들부들 떨게 되면 당신의 마음이 더욱 아플 것이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이 눈물이 이사악의 눈 위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이사악 위로 칼을 내리치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든 칼에 이사악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이사악의 죽음은 곧 아브라함의 죽음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죽기를 각오하였기에 이사악은 살아났다. 아니 아브라함이 살아났다. 하느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마저 아끼지 않을 만큼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다(창세 22,12 참조).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아브라함의 미덕이었다. 아브라함의 칼은 신앙의 칼이고, 약속의 성취에 대한 신뢰의 칼이며, 자신의 절망과 아집을 끊어 버리는 칼이었다. 그래서 약속은 새롭게 주어졌다.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

 

아마도 창세 22장은 어린이를 번제로 바치는 가나안의 풍습을 신앙의 이야기로 변형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노아의 법으로 금지하신 것처럼(창세 9,6 참조) 인간 번제를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단죄하신다. 창세 22장은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조건 없이 생명을 맡겨드리고 생명의 번성을 약속받는 믿음과 순종에 대한 극적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제사는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 준다. 이미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하였다(히브 11,19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6일 124위의 한국인 가경자(可敬者)들을 복자품에 올린다. 124위 복자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브라함의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다. 그들은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시편 63,4)한다는 고백처럼 생명의 주인에게 다함없는 경외와 찬미를 드렸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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