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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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탈향(脫向)의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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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40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탈향(脫向)의 실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 12,4). 그 나이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를 미지의 장소로 향하게 한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일으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세 12,2 참조). 아브람의 위대함은 사라이의 불임이 가져온 좌절과 체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미래를 향해 과감히 투신한 데서 드러난다. 그 투신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절대 순명의 결과였다. 아브람의 나그네 길은 탈향(脫向)의 실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탈출한 것인가? 그것은 ‘토후 보후’와도 같은 현재의 카오스 상황이다. 어디로 향한 탈출인가? 그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약속의 땅을 향한 나섬이다.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은 아브람의 심연에 새로운 빛을 창조하게 하고, 아브람은 이 빛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 탈향의 실존대로 살아간다. 아브람은 여전히 자식이 없었지만 하느님의 거듭된 약속(창세 12,2-3; 13,14-16; 15,5 참조)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으로 인정받았다(창세 15,6 참조). 그의 의로움은 도덕적 자질이기보다 믿음의 덕성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맺은 두 번째 계약에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계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요구하신다(창세 17,11 참조). 어찌 보면 할례는 살에 새겨진 하느님 주권의 표지이다. 후대의 생명을 가능케 하고 자기 생명의 역동성이 근거하는 가장 힘차고 민감한 부분에 계약의 표지가 새겨져,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탁월한 주권자로 드러나신다. 그 징표는 무엇보다 생명의 출산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살이고 사라의 나이가 아흔 살인데 아직 약속의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때로 그들의 희망에 대해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창세 17,17; 18,12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은 포기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이기에 믿었다.

 

마침내 출생한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온 이유였고,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라는 약속(창세 15,5 참조)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아브라함의 삶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창세 1,28)라는 하느님의 원초적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이 아브라함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명에 대해 두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미지의 땅에 대한 약속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의 별처럼 많으리라는 자손에 대한 약속이다. 땅과 자손은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다면 땅이 우선하는가, 자손이 우선하는가? 땅을 강조하는 것은 나중에 가나안 정복을 정당화하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 난민들을 탄압하고 그들과 갈등을 빚는 이유도 땅에 집착하는 시온주의(Zionism) 때문이다. 그러나 자손을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고, 이스마엘을 통해서는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어 세상의 모든 종족에게 복을 내리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리라는 점에서 사해동포주의나 박애주의의 토대가 된다.

 

하느님의 복이 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해석으로 명백해진다. 아브라함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다(로마 4,16 참조). 아브라함이 믿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이시다(로마 4,17 참조). 그분은 창조와 부활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생명에 대한 원초적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의 복으로 연결되고, 마침내 죽은 이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 생명의 영원함으로 확장된다. 아브라함의 탈향의 실존은 바오로에 의하면 믿음을 통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신비에 전율한다. 카오스에서 창조된 세계의 중심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아담까지 이르렀으며 노아의 홍수로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지만,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후손이 약속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에 대한 축복인가?

 

오늘날 세계에는 영토를 둘러싸고 도처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난민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고 쫓아내는 생명 거부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땅에 집착하여 타인의 생존권을 거부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하느님의 축복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도 거부하는 행위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갈 터전인 땅을 보장받아야 하고, 그러기에 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약속이 뜻하는 바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9월 10일 로마의 한 아프리카 난민 수용소를 방문하고 수십 명의 난민과 대화를 나눈 뒤, “교회는 돈을 벌려고 비어 있는 수도원을 굳이 호텔로 바꿀 이유가 없다”며 “이 시설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2013년 11월에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감동적인 고백을 한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mission)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 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로 우리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사명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생명이 땅보다 소중하듯 사명이 직책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명으로 자각하기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단지 말씀에 의지하면서 사명으로 날인된 탈향의 실존대로 살아갈 뿐이다. 아브라함은 불임의 존재로 모든 이의 조상이 된 역설적 사명(mission)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안에 ‘당신의 모상’이라는 DNA를 심어 놓으셨고, ‘자식을 낳아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어를 집어 넣으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닮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사명’이라는 교황의 말씀은 하느님의 모상성을 바탕으로 생명을 번성시키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지향하는 생명 친화적 우주에서 생명에 감사하며 그것을 보살피는 일이다.

 

성경의 관점에서는 한 번도 인구수가 문제되지 않았다.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인구를 조절하는 신의 통제 수단으로 홍수를 묘사하여 고대 근동 사회에서도 식량과 관련하여 인구 문제가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식량은 땅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폭력을 심판하는 수단이었을뿐 인구 조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아지리라고 하여 생명의 축복이 인구 과잉 문제보다 더 근원임을 보여 준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자손이 많으리라는 표현은 풍요 다산에 대한 단순한 은유인가, 아니면 언젠가 우주로 탈향하여 살게 될 인류의 미래를 말하는가? 하느님의 약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느님께서 강복하신 생명의 신비 속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그렇게 탈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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