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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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불완전한 만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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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36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불완전한 만남의 시작

 

 

입춘(2월 4일)과 더불어 청말 띠의 해가 본격적으로 봄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속설처럼 띠의 동물과 사람의 운세를 연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에서 곰은 단군의 어머니이다. 시베리아의 북방 민족(한티족 · 에벤족 · 에벤키족)은 곰을 형제요 자매로 여기면서 신성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물과 인간의 연대성은 열두 동물의 띠 개념으로 여전히 우리 의식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사실 창세기도 동물을 인간의 짝으로 고려한 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 2,2-25은 하느님, 인간, 동물(자연)의 상호 관계를 그린다. 여기에 생태신학의 밑그림이 담겨 있다. 생태신학의 세 가지 축은 하느님, 인간, 자연이다. 창세기 저자는 동물을 신성시한 토템 신화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벗겨 낸다. 하느님은 모든 관계의 근원이요 시작이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인간과 자연을 만나신다.

 

인간이 만나는 첫 번째 현실은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이다. 하느님께서 흙에서 온갖 탐스러운 나무를 자라게 하시면 사람은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한다. 동산을 돌보는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동산의 나무 열매를 먹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먹어야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을 의미한다. 이 결핍은 관계를 통해 채워진다.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먹을거리로 생존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생명의 공급원이다. 그러나 그 공급을 선물로 허용하는 질서를 하느님께서 세우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생명은 먹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꽃을 피운다. 결핍이 선물로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두 번째 명령은 선물에 제한을 두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 모든 것에서 따 먹을 수 있되 모든 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허용과 금기는 인간에게 결핍을 충족시키는 복의 기회요 한계에 대한 자각의 계기다. 선물이라는 복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지속되는데, 이것이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방식이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너’

 

인간의 자의식은 자신을 상대로 받아 주는 타인의 존재를 통해 생겨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처음으로 ‘너’라고 불러 주셨다. ‘너’라는 2인칭 단수 동사는 생명을 배려하고 양육하는 긍정적 명령과 금기의 명령 안에서 발설된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가장 원초적인 현실로 의식한다. 창세 2장이 제시하는 인간의 근원적 현실은 바로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나’로서 인간을 ‘너’로 불러 주신다. ‘나’라는 절대적 주체는 오로지 하느님이시다. 마르틴 부버가 발견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의 근원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그 원초적 만남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아담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담의 무반응과 무응답은 저마다 아담의 처지에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응답의 빈자리로 남아 있다.

 

 

동물은 인간의 협력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말씀하셨다. ‘좋지 않음’의 이유는 바로 ‘홀로 있음’이요, 인간에게 관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흙으로 만든 온갖 생물을 인간에게 데려가셨다. 인간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언어 능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생명과 달리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생명의 숨이 언어 능력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창세 2,7.19 참조). 인간은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 그들과 부드러운 지배 관계를 맺는다. 부드러운 지배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처럼(창세 1,29-30 참조) 두 번째 창조 이야기도 사람의 먹을거리로 식물이 주어진 조건(창세 2,16 참조)에서 비롯한다.

 

이 부드러운 지배는 생물의 이름을 불러 그 고유한 위치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게서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창세 2,20 참조). 언어를 갖지 못한 생명체와 소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알맞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kenegdô는 ‘상대자로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원으로 볼 때 neged는 ‘마주 대하다’를 뜻한다. 마주 대하여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물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이 인간을 그렇게 대하기란 어렵다.

 

 

하와는 아담의 협력자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사람이 여자를 보고 난 반응이 놀랍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아담의 이 감격적 토로는 실로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사랑 고백’이라 할만하다. 이어서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남자에게서(’îš) 나왔으니 여자(’iššâ)라 불리리라”(창세 2,23). 아담은 하와를 통해 남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다. 하와의 탄생은 아담과의 근원적 동질성과 성적 이질성을 통해 남자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담의 고백은 하와의 응답 없는 독백으로 그치고 만다. 게다가 아담은 하와에게 2인칭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담은 상대자(kenegdô)로 창조된 하와를 너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아담도 하와를 상대로 자신을 ‘나’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단수 1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여 자신의 뼈와 살에서 나온 하와를 지칭할 뿐이다. 나아가 아담은 하와를 만드신 하느님의 업적도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부처럼 하와를 소개한다.

 

바로 여기에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다. 갈빗대(tsēlā‘)는 한면(side)을 가리키는데, 아담은 자신의 한 면을 상실하는 대가로 자기 상대역을 만났으나, 하와는 여전히 그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와를 ‘너’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담의 ‘나’라는 주체성도 성립되지 못한다.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응답을 듣지 못했고, 동물의 이름을 불러 준 아담은 동물의 답을 듣지 못했으며, 하와를 너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소개한 아담은 하와와 대화하지 못했다. 창조의 처음부터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장차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세상에 폭력이 들어오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결과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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