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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45: 감사해요! 나를 원해줘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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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45) 감사해요! 나를 원해줘서요 작고 여린 생명이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
부모로부터 거부당한 자의 고통
“제 부모님은 진짜 부모님이 아니래요. 진짜 부모님은 저를 낙태하려고 했고요. 쌍둥이 오빠가 있었는데, 낙태 실패 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었대요. 부모님이 모든 것을 숨기고 제가 다른 아이들과 같다고 생각하게 했다는 것에 화나고, 내 진짜 엄마에게도 화가 나요. 날 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요!(I am angry at my real mom for not wanting me!) 엄마는 왜 절 원하지 않은 거죠?(Why didn‘t she want me?) 제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결국, 친엄마를 찾았는데요. 친엄마는 여전히 절 원하지 않더라고요.(She still doesn’t want me.) 저는 죄책감이 들어요. 그 죄의식은 제 일부로 느껴져요. 오빠가 살아야만 했어요. 저는 살면 안 되고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너무 싫어요.”
영화 ‘옥토버 베이비’에서 낙태 실패로 인해 태어난 한나가 성당을 찾아가 사제에게 내면의 고통을 토해내는 장면이다. 그 감정은 엄마가 나를 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다. 태아라서 어른과 같은 수준의 의식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태아와 엄마는 정서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사람은 태아 시절 엄마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무의식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정서적 바탕에서 살게 된다. 한나가 토로하는 내쳐지고 버림받은 감정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생긴 것이 아니라, 생애에 걸쳐 이어지는 상처이자 빙산의 수면 아래와 같은 부분이기에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엄마는 왜 절 원하지 않은 거죠?” 인생 최초의 경험이 거절과 낙태였던 한나의 한 맺힌 절규다. 친엄마는 술집에서 처음 만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한나를 임신한다. 한나의 친엄마는 학업과 외적 성공을 위해서는 낙태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편의와 성공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생명을 장애물로 취급한 것이다. “제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한나와 그 쌍둥이 오빠(조나단)는 아무 죄가 없다. 죄는 쾌락만으로 성관계하고 그 책임을 지지 않은 친부모에게 있지만, 죗값은 무죄한 자녀들이 치른다. 조나단은 죽음으로, 한나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이것이 낙태의 가장 큰 문제이자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태중에서의 내침이다. 한나는 친엄마를 만났지만, 엄마는 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엄마에게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또다시 내쳐진 한나는 크게 분노한다.
한나는 한 사제의 조언을 따라서 ‘용서’를 선택하고 악을 극복한다. 마음으로 엄마를 용서하고 변호사인 친엄마의 사무실을 몰래 찾아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쓴 메모와 출생 당시 손목에 둘렀던 엄마 이름이 적힌 띠를 조용히 놓고 오면서 용서를 완성했다. 친엄마에게 나를 왜 버렸느냐고 분풀이하듯 따지지도 않았고, 사과하라고, 나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떼쓰지도 않았다. 한나가 남긴 메모와 띠를 발견한 엄마는 주저앉아 오열한다. 친엄마에게 깊은 회심이 일어난 순간 한나도 깊게 치유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대학에 입학해 가족을 떠나는 한나가 아빠에게 안기며 한 말이다. “감사해요. 아빠! 나를 원해줘서요.(Thank you for wanting me.)” 한나는 용서를 통해서 자기 안의 분노라는 악을 제거했기 때문에 양부모가 자신을 진정으로 원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됐고, 하느님 은총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예의
이 영화는 태중에서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파괴될 때 얼마나 큰 악이 저질러지고, 회복은 얼마나 어려운지 여실히 보여준다. 한나가 다양한 형태로 반복하는 단어 ‘원하다(want)’는 ‘옥토버 베이비’의 주제를 온전히 담고 있다. 이 원함이야말로 인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성관계 동의가 임신 동의는 아님”, “엄마 되지 않을 권리” 낙태를 합법화하라는 여성단체의 구호다. 임신을 유발하는 필연적 행위를 하면서도 원치 않으면 자유롭게 낙태하는 세상이 과연 올바른 사회일까? 운전이 사고 동의는 아니고 사고가 운전의 필연적 결과도 아니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을 져야 하므로 모든 운전자의 보험 가입 의무가 상식인 것처럼, 성관계라는 행위와 그 필연적 결과인 임신에도 ‘원치 않음’과 낙태라는 몰상식이 아니라 ‘원함’과 ‘책임감’이라는 상식이 정착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치 않은 아기(unwanted baby)’라는 폭력적인 언어가 만들어지며, 죽임을 당한 낙태 희생자 조나단과 내침의 상처로 분노가 가득 찬 삶을 사는 낙태 생존자 한나가 수없이 발생한다. 강한 폭력성을 내재한 개인이 많아지는 위험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원치 않음’이 내 권리인 것 같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나만 생각하는 악의 시각이며, 이런 입장에서 행동하면 더 큰 악을 불러들여 삶이 더 고통스럽게 될 뿐이다.
“그때는 아이를 지우는 게 물어볼 필요 없이 쉬워 보였어요. 낳는 게 실패로 보였거든요. 많은 젊은 여성이 임신을 실패라고 생각하는데, 참 부끄러운 일이죠. 말하지 않는 한, 낙태는 오랫동안 비밀로 감출 수 있어요. 촬영이 시작됐고, 저는 대본대로 연기를 이어갔어요. 그때 저는 하느님이 제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순간 완전히 치유됐고, 저는 주저앉아 울어버렸습니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하느님과 함께하는 순간이었어요. 이제 너는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한나의 친엄마를 연기했던 배우(셰리 릭비)의 고백이다. 20년 전 낙태를 진정으로 용서받는 체험을 한 이유는 ‘원치 않음’과 낙태가 오판과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생명의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과거 낙태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여성이 셰리처럼 방향을 바꿔 생명의 수호자가 되고, 삶에 은총을 끌어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0월 21일, 이광호 베네딕토(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0 1,41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