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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정치공동체, 국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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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7 ㅣ No.1583

[복음으로 세상 보기] 정치공동체, 국가란?

 

 

사전적 의미에서 국가란 일정한 영토를 가지며 거기에 사는 국민들로 구성되고 하나의 통치 조직을 가진 집단을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주권을 갖는 조직입니다. 국민들의 주권은 주로 투표로 행사되며 선출된 사람들을 통하여 국가는 운영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 1조와 2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통령도 5년짜리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일상의 삶에서 펼쳐지게 노력하는 것이 선출직 공무원들의 의무입니다.

 

대통령의 경우 취임식 때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합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직책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대통령이 마치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오랜 왕정시대, 일제 강점기, 전쟁, 군사 독재 등의 암울한 역사를 지내면서 굳어져서 그렀다고들 합니다. 지난 역사 동안 국민이, 그 집단의 구성원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은 들쥐 떼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 지도자를 따른다.”는 한국에서 오랜 시간 근무했던 어떤 외국군인의 발언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이나 우리 국민들이 주인의식을 갖지 못하며 살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던 중 지난 1~2년 사이에 시민들의 의식 안에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이 중심을 잡게 된 것은 무척이나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입니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과 “이게 나라다!”라는 증명이 거듭되는 동안  국가에 대한 생각이 우리들 머리와 가슴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국민으로, 세계시민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치공동체의 토대와 목적

 

간추린 사회 교리 384항에는 “정치 생활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치공동체 즉 국가로 표현되는 통치 집단은 그 근본과 목적을 인간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완성에 이르는데, 정치공동체는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인 공동선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정치 공동체의 토대와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함으로써 인간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정치공동체 즉 국가는 그 구성원의 완성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 구성원들의 완성을 돕기 위해서 일정한 힘이 필요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찰이나 군인이 필요하고 공무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국민들은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힘을 부여하는데 이를 공권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지 다른 개인적 이익이나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공권력의 남용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선의 요구는 공권력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 나타난 권리들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며, 각개인의 의무를 이행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하는 일입니다.(지상의 평화 63항)

 

그러므로 공권력은 철저하게 국민들의 권리를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힘입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권력이라는 말이 힘없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힘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정당한 요구를 외치는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의 외침을 잠재우는 데에 쓰인 것입니다. 이제 정치공동체에 맡겨진 공권력은 그 구성원들에게 친절한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항권 

 

정치공동체가 정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은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저항권 행사를 위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기의 사용까지도 허용하는 데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본권이 확실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침해를 받을 때 2) 다른 수단을 모두 사용하고 난 후에 3) 더 심한 무질서를 유발할 우려가 없을 때 4)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일 때 5)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더 나은 해결책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설 때 등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폭력 의존에 따르는 위험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어떤 경우에서든 도덕적인 원칙에 더욱 부합하고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가진 방법인 소극적 저항을 실천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00-401항 참조)

 

 

예수님과 정치공동체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 특히 그분의 존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국가권력을 대립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는 말씀도 이런 사람들의 부추김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이유는 그가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돈으로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대립시키는 사람들은 마치 세금을 내는 것이 황제를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드러내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루카복음 22장 25-26절의 말씀입니다.

 

황제가 황제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것은 가장 작은 사람에게까지 헌신하여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설사 그가 권력을 가졌고,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하여도 그는 잘못된 황제일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는 정치공동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충실한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정치 공동체

 

교회와 정치 공동체 모두 조직으로 드러나지만 형태나 추구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사목헌장 76항)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호 자율성은 협력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둘 다 자격은 다르지만 동인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합니다.

 

교회와 정치공동체는 사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개인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대의 환경을 고려하여 서로 협력을 더 잘하면 할수록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더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하도록 말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9월호,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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