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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39: 생명존중! 생명에 대한 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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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39) 생명존중! 생명에 대한 예의 태아, 수정 순간부터 인간이며 하느님에게서 온 영적 존재
낙태 허용 주장의 사실과 거짓
“임신중단 합법화돼야 합니다. 임신중절수술 90%는 임신 12주 이내 시행, 6개월(22주) 미만 태아는 뇌가 없어 감각이 없고, 강간으로 임신해도 강간범이 강간을 인정 후 낙태에 동의해야 수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궁은 개인의 장기이며 국가가 개인의 몸에 대한 선택을 막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한 여성단체가 강남역 화장실에 붙인 광고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는 누구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사실에 근거해야만 한다.
‘낙태수술 90%는 임신 12주 이내 시행.’ 여성단체가 근거로 내세우는 미국과 유럽의 경우도 낙태 허용 기간은 대체로 12주 이내며, 이후 행해지는 낙태는 불법이다. 임신 초기에만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뿐, 낙태죄를 폐지하지 않았다. 12주는 1973년 낙태를 최초로 합법화한 미국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에서 임의로 정한 것인데, 낙태 옹호론자들은 이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그 기저에는 12주 이전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다. 이는 발생학과 영상의학이 증언하는 “수정된 순간부터 독립된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는 과학적 사실과 배치되는 신념이다.
‘6개월(22주) 미만 태아는 뇌가 없어 감각이 없다.’ 임신 7주면 태아는 중추신경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머리가 몸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등신이 되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춘다. 6주차에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엄마가 임신을 인식하기 어려운 6주 이전에 이러한 생명현상이 다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6개월 미만의 태아는 뇌가 없으니 감각도 없다며 낙태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강간으로 임신해도 강간범이 동의해야 낙태할 수 있을까? 모자보건법 14조에는 배우자(사실혼 관계 포함)의 동의조항만 있을 뿐, 강간범의 동의조항은 없다. 법률을 정확하게 모르는 일반인의 분노를 촉발하는 선동용 거짓말이다.
“태아는 인간 생명인가?”, “예”
태아는 여성이 원하기만 하면 조건 없이 제거될 수 있는 존재일까? 임신 14주차에 자연유산을 경험한 엄마가 페이스북에 아기의 사진과 함께 낙태는 살인 행위이며, 태아는 임신 주기나 크기에 상관없이 소중한 생명임을 강조하여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글이 있다.
“저의 소중한 아들이 배 속에서 14주 6일을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몸은 완전히 형성되기 시작했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이의 손가락에 난 손톱뿐 아니라, 연약한 몸속에서 혈관을 따라 흐르는 혈액도 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부탁은 만약 여러분 중에 낙태를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다시 생각해보시길 바란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부끄럽게 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배 속 아이를 사산한 여성이 드리는 부탁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여기시는 분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분명 그 선택이 나중에는 후회스럽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비참한 심정을 지니고 있는 저지만, 아들의 짧았던 모습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도록 해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엄마가 공개한 사산된 아들의 사진은 태아가 사람의 편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명확히 보여줬다. 이는 과학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셨다. ‘태아가 인간 생명인가?’라는 질문에는 ‘예’, ‘태아를 죽여도 좋은가?’라는 질문에는 ‘아니요’라고 답해야 한다.
“미혼모와 사생아는 있지만, 도망간 남자를 뜻하는 말은 없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함흥XX. 임신중단 권리는 여성의 기본권.” 낙태허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작한 포스터다. 양육비 책임법이라는 분명한 대안이 있음에도 여성의 억울한 처지만 부각해서 책임이라는 본질을 흐려버린다. 이들에게 양심과 예의를 찾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惡)이다.
태아가 보내는 살려달라는 메시지
“감정에 휩쓸렸던 그때, 피임했음에도 아이가 생겼다. 남자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남자 친구는 산부인과에 함께 가보자 했고, 나는 걱정과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초음파로 임신을 확인하자 그제야 기쁨을 표현한 남자 친구는 결혼하자고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려면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혼날 걱정에 마음 졸이고 있던 날,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에 와있던 두 언니와 함께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급하게 방에 들어오시더니 “내가 지금 태몽을 꿨는데, 임신한 사람이 큰 애 너냐? 아니면 둘째 너냐?”라고 물으며 꼭 낳으라고 하셨다. 큰 언니는 둘째 딸을 낳은 지 6개월이었고, 둘째 언니는 산후조리 중이었으므로 언니들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잠결에 이야기를 듣던 나는 때가 됐다 싶어 언니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혼날 각오 하고 있었지만, 언니들은 잘됐다며 엄마에겐 잘 얘기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결혼하라고 말해 줬다.
만일 남자 친구가 생명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거나, 모른 척했다면 어땠을까? 임신 사실을 부모님께 말 못하고 끙끙거린 시간이 더 지속됐다면? 어머니께서 태몽을 꾸지 않았다면? 그래서 언니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 후로도 하느님께서 둘째와 셋째를 선물로 주셨다. 지금은 2남 1녀의 엄마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태아는 수정된 순간부터 인간이며 동시에 하느님에게서 온 영적 존재다. 이 사람이 꿈이라는 영적 통로로 외할머니에게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소중한 태아는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고, 그 사태를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이것이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9월 2일, 이광호 베네딕토(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0 1,46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