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께 드리는 완전한 순종과 봉헌(판관기) |
---|
[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께 드리는 완전한 순종과 봉헌
완전한 봉헌물과 불완전한 봉헌물
“저희 가운데 누가 먼저 가나안족과 싸우러 올라가야 합니까?”(판관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영도자인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작정 전쟁에 나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정복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를 하느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들이 나약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전쟁이란 자신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짐을 알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치러야 하는 전쟁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심, 그리고 그들의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승리가 보장되는 성격을 띠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유다 지파가 선봉을 맡고, 유다 지파의 제안에 따라 시메온 지파가 먼저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족과 싸우며 약속의 땅을 정복해 나아가는데, (판관기의 묘사에 따르면) 각 지파의 승리 후 가나안 주민들을 처리하는 모습에 차이가 있습니다.
– 유다의 자손들은 예루살렘과 싸워서 그곳을 점령하여, 주민들은 칼로 쳐 죽이고 성읍은 불태워 버렸다.(1,8)
– 유다 지파는 자기들의 형제 시메온 지파와 함께 진군하여, 츠팟에 사는 가나안족을 쳐 죽여서 그곳을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1,17)
– 벤야민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1,21)
– 므나쎄 지파는 벳 스안과 거기에 딸린 마을들, 그리고 … 거기에 딸린 마을들에 사는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족은 계속 그 땅에서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다음에 가나안족에게 노역을 시켰지만, 그들을 쫓아내지는 않았다.(1,27-28)
– 에프라임 지파도 게제르에 사는 가나안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족이 게제르에서 그들과 섞여 살았다.(1,29)
– 즈불룬 지파도 키트론 주민들과 나할롤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족이 그들과 섞여 살다가 노역을 하게 되었다.(1,30)
– 아세르 지파도 아코 주민들, 시돈 주민들, 그리고 아흘랍, 악집, 헬바, 아픽, 르홉에 사는 주님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아세르인들은 그 땅 주민인 가나안족과 섞여 살았다. 아세르인들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1,31)
– 납탈리 지파도 벳 세메스 주민들과 벳 아낫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납탈리 지파는 그 땅 주민인 가나안족과 섞여 살았다. 그러다가 벳 세메스와 벳 아낫 주민들이 납탈리 지파를 위하여 노역을 하게 되었다.(1,33)
– (가나안 땅에 살던) 아모리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하나인) 단의 자손들을 다시 산악 지방으로 내몰고, 평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모리족은 하르 헤레스, 아얄론, 사알빔에 계속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요셉 집안의 세력이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자 그들도 노역을 하게 되었다.(1,34-35)
여기서 ‘가나안족’이란 팔레스티나에 살던 여러 종족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렇게 판관기 1장이 전하고 있는 아홉 개 지파의 활약상에는 ‘가나안족을 완전히 없애버린 이야기’와 가나안족을 쫓아내기는커녕 ‘가나안족과 함께 섞여 살았던 이야기’가 대비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판관기는 유다 지파가 가나안족을 하느님께 완전 봉헌물로 바친 반면에, 다른 지파들은 가나안족과 섞여 살면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의 신까지 섬기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 봉헌물에 관한 규정은 일찍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첫 파스카를 지내고 예리코 성읍을 점령할 때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셨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완전 봉헌물이다. … 너희는 완전 봉헌물에 손을 대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하여라. 탐을 내어 완전 봉헌물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진영까지 완전 봉헌물로 만들어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여라.”(여호 6,17-18)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성읍을 점령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완전 봉헌물로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완전 봉헌물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고, 그것이 아까워 탐을 내서 자신들의 것으로 차지할 경우 자신들까지 하느님께 바쳐지는 완전 봉헌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내려다보고 있는 알프스 산자락에 훙어스부르크(Hungersburg), 곧 ‘굶주림의 성’이 있는데 그곳에 다음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곳에 심한 기근이 들어 많은 이들이 제대로 먹지를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 영주의 부인이 말을 타고 마을에 산보를 나왔는데, 한 여인이 굶주린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부인 앞에 엎드려 애원했지요. “제 아기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 아이에게 먹일 빵을 주십시오!” 이에 영주의 부인은 구걸하는 그 여인에게 돌과 같은 덩어리 하나를 주었습니다. 금화 같은 동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부인이 준 것은 돈이 아닌 돌이었습니다. 그렇게 돌을 준 순간 영주 부인의 몸은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돌이 되어버린 영주의 부인은 오늘날 실제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스부르크 시내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꼭대기 왼쪽 능선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마치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입니다.
전설 속 영주의 부인은 구걸하는 여인에게 돌을 주었고, 그렇게 돌을 준 죄로 자신이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그대로 되돌려 주시리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의 나눔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봉헌과 감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불완전한 봉헌의 결과 – 재앙의 선포
“그때에 내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와 맺은 계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내가 말해 둔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너희의 적대자가 되고 그 신들은 너희에게 올가미가 될 것이다.”(판관 2,1-3)
하느님의 천사가 이스라엘에게 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가나안땅의 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신들을 섬기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재앙을 선포하신 것이지요. “그의 세대 사람들도 모두 조상들 곁으로 갔다. 그 뒤로 주님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업적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나왔다.”(판관 2,10) 판관기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재앙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이어지게 될 징벌의 시작이었습니다. 곧 다음 세대에 속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느님도 모르고 그분의 업적도 알지 못하여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신들, 곧 땅을 관장하는 남신(男神)인 ‘바알’과 사랑과 풍요 다산의 여신(女神)인 ‘아스타롯’을 섬겼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게 원인이 되어, 다시는 원수들을 맞서 이길 수 없을 만큼 나약한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그 어떤 전쟁에도 전과 같이 함께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겪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것은 극심한 곤경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하신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판관 2,15)
우리는 어떤 세대에 속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과 그분의 업적을 알고 있는 세대인가요? 아니면 하느님도 그분의 업적도 알지 못하고 있는 세대인가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께 대한 앎이나 인식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이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우리 세대 전체를 생각한다면 하느님을 알고 있는 세대가 아닌 것도 자명(自明)하겠지요.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이 이 세대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지향, 또 나 자신도 이 세대에 책임이 있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자 힘씁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0 1,02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