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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 생명, 그리고 사형제(死刑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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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02 ㅣ No.1726

[알아볼까요] 인간, 생명, 그리고 사형제(死刑制)

 

 

한 쪽에서는 “살인마를 처형하라”는 피켓을 든 시위대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사형에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잠시 고요가 흐르고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환호와 탄식이 교차한다. 미국의 사형 집행 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대립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한 쪽은 ‘죽이자’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살리자’는 것이다. 논쟁은 평행선을 달린다. 어설픈 타협이란 없다. 이 양극단의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것이 사형제(死刑制)를 마주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사형제에 대한 찬반의 양론을 잠시 뒤로 하고 사형제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사형은 형벌이다. 형벌이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우리 법에는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 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 등 9가지 형벌의 종류가 규정되어 있다. 사형도 이러한 형벌의 일종이지만, 다른 형벌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근대 이후 형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제시되어 왔다. 첫 번째는 형벌을 통한 범죄예방효과다. 즉, 범죄자를 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를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다른 형벌의 목적은 형벌을 통해 범죄자를 교화하여 재범을 막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형벌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예컨대 다른 사람을 때린 사람에게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사회를 향해 ‘다른 사람을 때리면 이렇게 처벌받으니 함부로 때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고, 그 범죄자에게는 ‘형벌을 받으며 반성하고 다시는 남을 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형은 두 번째 목적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형벌, 사형

 

사형은 생명을 빼앗는 형벌이라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형벌이다. 사형을 극형(capital punish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사형은 한 번 행해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도 강력하다. 이른바 사형의 ‘불가역성’이다. 그런데 현실의 재판은 인간이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실수할 가능성이 늘 있다. 제아무리 공정하고 합리적인 법관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인간이 재판을 하는 이상 ‘오심’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지난 2월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협력할 것을 꾀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던 보도연맹 사건 관계자 7명이 사형 집행 70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지난 1월에는 여순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희생자들의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오래다. 가족 간첩단 사건, 유럽간첩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진보당 사건 등에서도 재심 끝에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이미 사형이 집행되고 난 이후였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민족일보 사건, 대구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의 관계자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석방되어 재심으로 누명을 벗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두고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있었던 암울한 역사였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 법치국가에서도 오심은 피할 수 없다. 미국 사형정보센터(DPIC)에 따르면 1973년부터 지금까지 165명이 넘는 사형수가 결국 무죄로 밝혀졌다고 한다. 오심에 의해 누명을 섰을 때는 재심의 기회를 주고 명예를 회복시키고 금전적인 손해도 배상해야 한다. 그런다고 이미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원상복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사형을 당하고 난 이후라면 방법 자체가 없다. 사형은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형은 매우 오만한 형벌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과정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형과 같이 되돌릴 수 없는 극형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유한함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감히 사형과 같이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오늘날 절단형, 태형, 장형, 경형, 낙인형 등의 ‘신체형’이 점차 사라진 것은 그 자체로 잔혹한 형벌이기도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신체의 손상을 가하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사형폐지는 세계적인 추세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 이상 사형제도를 두고 있지 않다. 2018년 기준으로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한 국가는 106개국이다. 사형제도는 두고 있지만 사형 집행을 10년 이상 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을 폐지한 나라까지 합치면 142개국이다. 대략 국가의 3분의 2 정도는 사형이 폐지되어 있는 것이다. 주요 국가들 중에는 미국과 일본 정도가 사형존치국이고, 동북부 아프리카 국가들과 중동, 아시아 일부 국가들에만 사형제도가 남아 있다. 미국은 사형 존치국의 대표로 자주 언급되지만, 2010년 이후 계속 집행건수가 줄어 최근에는 20~30건 정도에 그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는 21개 주가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한 상태다.

 

세계적인 합의도 확고하다. 1989년 유엔 총회, 2007년 유엔 총회에서도 사형제도 폐지가 국제적 합의임이 확인된 바 있고, 유럽연합은 회원 국가 전체가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고, 유럽연합 가입을 원하는 국가들에는 사형제도 폐지를 전제 조건으로 제시할 정도다.

 

세계 각국이 이렇게 사형을 폐지한 이유는 결국 ‘인간’에 대한 관점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사형시킴으로써 생명권을 빼앗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 자체를 박탈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재판의 한계를 인정하기에, 되돌릴 수 없는 극형은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종교인이라면 인간의 생명을 뺏을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인간의 유한함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그 어떤 종교가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를 무조건 용서하거나 무죄방면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살인자에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형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다만 그것이 사형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들은 살인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생명만큼은 살려둠으로써 우리 사회가 살인범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도 굳이 잔혹하고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인 사형을 내리지 않아도, 살인 등 흉악범죄를 막고 생명의 존귀함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무기징역형이나 수십 년의 징역형으로도 충분히 강한 형벌이고 그것으로도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사형 폐지, 인간과 생명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위하여

 

이러한 선택이 이상적으로는 그럴듯하나 현실에서 가능할지에 대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입증해 왔다. 오늘날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들은 대체로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나라다. 거꾸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 특히 전 세계 사형집행건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 이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은 대체로 치안이 불안하고 흉악범죄율도 더 높다. 사형제를 통해 생명을 지키겠다는 관념은 이미 현실 세계에서는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사형제는 여전히 있지만 1997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형을 집행하고 있지 않다. 20년 넘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제 명목상으로만 남은 이 사형제를 폐지할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과 ‘생명’에 대한 윤리적인 이해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과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결단을 위한 논의가 다시 한 번 시작되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홍성수 토마스 아퀴나스(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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