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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학칼럼: 선량한 인종차별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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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2 ㅣ No.1747

[신학칼럼] ‘선량한’ 인종차별주의자들

 

 

워싱턴 DC 평화시위 (6월 8일) / 사진출처: Catholic News Service

 

 

흑인들의 삶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고통스럽고도 절박한 이 외침이 미국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다. 46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 데렉 쇼빈의 무릎에 짓이겨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가던 8분 46초. 이 아득하게 괴로운 시간은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미국 사회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분노의 세월을 살인이라는 결과로 압축한다. 2020년 6월 미국의 “Black Lives Matter(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은 단순히 경찰 폭력에 대한 징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아니다. 이제 이 운동은 총체적으로 망가진 시스템을 교정하고자 하는 비폭력 혁명으로, 인종과 연령을 초월한 온 국민의 평화 시위로 발전했다. 이 시위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감도 크다. 많은 평신도와 수도자와 사목자들이 피켓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서거나 기도를 통해 변화의 기류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워싱턴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윌튼 그레고리(Wilton D. Gregory) 대주교와 예수회의 제임스 마틴(James Martin, SJ) 신부는 인종차별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악임을 분명히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직간접적인 동참을 뜨겁게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양극화 현상은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심각하다. 그레고리 대주교와 마틴 신부와 같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며 사회적 교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시위대를 줄곧 “폭도”, “좌파”로 비난하며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있는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의 중심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대다수는 개신교 복음주의자들, 특히 백인 복음주의자들(White evangelicals)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이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들이다. 이들은 연방군 투입까지 고려하며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려는 트럼프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가 신의 “갑옷과 투구”를 입었다고 환호하고, “신이 그에게 힘을 주셨다”라며, “그가 이제 신과 함께 예리코로 향할 것이다!” 하고 열광한다. 이들은 그레고리 대주교가 트럼프에게 정중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라인 서명을 작성하고 대주교를 향해 험악한 혐오 발언을 퍼붓는다.

 

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물론 낙태나 성소수자와 관련된 정책 때문에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보다는 인종차별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그들의 가치관이 더 근본적인 이유다. 인종차별은 하나의 이념이나 유형으로 정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클란(The Ku Klux Klan)과 같은 인종차별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수도 만만치 않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 중에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는 이들은 사실 쉽게 찾을 수 없다. 차별의 스펙트럼도 넓고, 표현되는 방식도 다양하며, 본인이 차별하고 있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소위 ‘선량한’ 차별주의자들도 많다. 더구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극렬한 근본주의 신봉자들 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성실하고 근면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은 ‘평범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온건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인종차별주의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가치’ 때문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교리처럼 공고하게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되어 버린 소위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미국의 정신이자 신앙인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신의 선물이고, 그 일에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며, 그렇지 않다면 신이 부여한 재능을 허비하는 것이고 현세에서의 신의 명령과 축복을 거부하는 죄”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살아간다. 충실하게 신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신은 물론 번영을 약속한다.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는 그들에게는 다양한 사회악들(가난, 인종차별, 젠더 차별, 이민/ 난민 문제 등)을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할 분석적 시각이 없다. 세계 최강국의 시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삶의 조건이 실은 흑인 노예들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구조적인 차별로 말미암아 교육 혜택을 못 받고 만성적인 실업을 경험하는 흑인들을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죄인들”이라 혐오한다. 사회복지 정책은 나태한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게으름을 증폭시키는 몹쓸 정책에 불과하다. 또 이민자들과 난민들은 자신들이 애써 일구어 놓은 땅에 갑자기 들어와 직업을 뺏고 무임 승차하려는 약탈자들이다. 이들은 결코 자신들이 기득권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종 ‘사회주의 정책’에 의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고 사는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색인종이나 이민자들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 “나태한 자들”, “이기주의자들”, “죄인”들에 대해 신앙인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천주교 신자들은 어떨까? 미국의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들은 세상의 변화가 두렵다. 이들은 살면서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다만 그 가르침을 따르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굳어진 전통은 죽은 것이며, 상황에 맞는 해석이 적용되어야 전통이 살아 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수호하고 싶어 하는 ‘하느님이 세운 질서인 자연법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이 실은 백인과, ‘보편적인’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들 그룹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에 비해 인종적 분포가 다양하다. 백인 뿐 아니라 전통적인 천주교 문화에서 자란 한인 교포들을 비롯 많은 이민자 신자들, 가난하고 어려운, 신앙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신자들 또한 이 그룹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에 대해 성서와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인종차별은 명확하게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악이다. 사람이 타고난 조건을 빗대어 차별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지으신 하느님의 뜻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혐오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허락하고 정당화하는 자연법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다.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조민아 마리아 교수(조지타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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