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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회교리의 원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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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회교리의 원리들 (1)
사회교리 두 번째 시간으로 사회교리의 원리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는 한 마디로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여러 원리들을 의미합니다. 즉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은 다음에 다루게 될 이 핵심 원리 안에서 정리되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원리들은 가톨릭교회가 신앙과 이성으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원리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하고 그 의미가 보편되므로, 사회의 여러 현실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가장 기본이 되며 으뜸의 잣대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본질 부분이 되며 또한 올바르고 참되며 새로운 사회생활로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인간들이 사회생활에서 이 원리에 따라 합당하게 살아야 하며 법, 관습, 규범, 규약과 같은 여러 사회 제도에도 이 원리들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본 원리는 ‘인간 존엄성의 원리’(또는 인격성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의 원리는 다른 원리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이 인간 존엄성의 원리에서 파생된 중요한 원리들은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또 이 원리들과 연관되는 ‘재화의 보편 목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참여’와 같은 실천 원리들이 있습니다.
1) 인간 존엄성의 원리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참조) 이처럼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한 근거에 따라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이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와 계약을 맺고,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357항)
결국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 거룩하신 하느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인간의 존엄은 단지 인간이 지닌 인격의 특성이나 어떤 능력에만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정신과 영혼의 거룩함을 지니며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지성의 능력을 잃거나 결여된 식물인간, 장애인, 혹은 노인과 아이들 등등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똑같이 존엄한 것입니다.
인격 - 인간의 초월성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고 창조의 절정이라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처럼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만이 지니는 특별한 능력과 가능성을 ‘인격’이라고 합니다. 인격을 지닌 인간의 특성은 첫째, 단일성과 초월성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단일체로서 육체를 통해서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이 세상과 유대를 맺습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자신의 정신(영혼)을 통해서 사물의 영역을 초월하여 영적이고 불멸의 영혼을 지녀서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 특성을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인간의 초월성에 대한 갈망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님, 주님을 향해 가도록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편치 않나이다.”(1권 1장)
둘째, 인격을 지닌 인간은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의지로써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행위의 주체로서 윤리에 따라 판단하고 의지로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며, 이에 대해 책임집니다. 셋째, 인간은 이런 이성과 의지로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지식을 나누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을 합니다. 이처럼 사회생활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은 가족, 국가 공동체, 종교 공동체 등의 여러 가지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넷째, 인간은 되풀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침해하여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식과 자유의 중심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다른 어떤 사람의 삶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유
“인간의 자유는 선물로 준 것이며, 마치 한 알의 씨처럼 받아들여 책임감을 가지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진리의 광채 86항) 자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선(善)을 선택하고 자신의 창조주를 찾으며 완성되도록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이 주도하여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을 이끌어가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가진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인간의 자유는 무한(無限)하지 않고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진리 규범의 창시자나 절대 주인이 아님을 자각하면서 하느님께서 결정하신 윤리법을 받아들일 때 완성된 자유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윤리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손상시키고, 자신을 속박하며, 이웃에 대한 우애를 파괴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거역하게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40항)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교회 교도권의 결정으로 긴 시간 공동체가 함께 하는 공적인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앙의 자유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지만, 신앙의 자유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종교행위의 자유가 자신을 비롯한 다수의 생명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충분히 재고하여 나온 결과였던 것입니다.
2) 공동선의 원리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사회는 인간의 존엄, 일치, 평등에 근거한 공동선의 원리를 실현해야합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공동선을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인간이 자기 자신의 완성을 더 충만하게 더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을 포함하고”(어머니요 스승 65항) 있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곧 공동선은 개인을 사람답게, 사회는 인간 사회답게 만들어 가는 제반 사회생활의 조건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교리에서 공동선은 개별 선의 총합이라는 산술적 뜻의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선은 서로 나누면서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선(善)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혀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선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개인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선을 위하여 헌신하고, 사회는 개개인과 모두의 선을 위하여 노력할 때 그 사회는 공동선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공동선의 원리에 따라 인간 존엄을 존중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처럼 공동선을 달성해야 할 책임은 특별히 국가에 있습니다. 국가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 다수와 소수의 이익을 올바로 조정하기 위하여 정의에 따라 공동선을 찾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국가는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하느님은 궁극 목적이시고 완성자이시며 최고의 선, ‘지고지선(至高至善)’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의 궁극의 공동선은 하느님 안에서 성취됩니다. 하느님만이 이러한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떻게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당신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을 찾는 것이오니, 제 영혼이 살도록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제 육체는 제 영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제 영혼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만 만족을 주실 수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18 참조)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5월호, 이광휘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복음으로 세상보기] 사회교리의 원리들 (2)
사회교리의 원리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원리들 중 ‘인간 존엄성의 원리’와 이 원리에서 파생된 중요한 원리들 중 하나인 ‘공동선의 원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달은 사회교리 세 번째 시간으로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재화의 보편 목적
제가 소임하고 있는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이주사목위원회는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노동사목회관’이라는 건물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회관은 2001년 5월1일 축성된 8층 건물로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주 좋고 튼튼하고 넓은 공간입니다. 우리 이주민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담당하는 부서가 안정된 공간에서 일할 수 있음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회관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1995년 당시 76세 골롬바 자매님의 대지 기증으로 가능하였습니다. 골롬바 자매님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셨고, 당신의 전(全) 재산인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과 대지를 서울대교구에 기부하셨습니다. 기부의 조건은 단 한 가지 ‘이 대지에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건물을 세워 주기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몇 년 전 화재(話材)가 되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콩의 유명한 영화배우 주윤발 씨에 대한 기사입니다. 그는 유명 연예인에 큰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한 달 용돈으로 11만 원가량을 쓰며 근검절약을 실천한다고 합니다. 또한 대중교통 애용자로 자주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목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랍고 존경스러운 부분은 그의 한 마디 말입니다. “내 전 재산은 잠시 맡아둘 뿐입니다.” 그러한 말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실천으로 사망 후 전 재산 8100억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 두 분외에도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진 것들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알고 또 믿고 있기에 가능하겠습니다. 예전에 강의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내가 만약 여유롭게 가지고 있다면, 나의 욕심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결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완성을 지향하는 데에 재화(財貨)는 필요한 수단입니다.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살려면 재화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칙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지상 재화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재화의 공동 사용권) 따라서 국가는 이 권리가 균등하고 질서 있게 행사될 수 있도록 합의를 통하여 개인의 재화 소유와 사용권을 규제하도록 개입하고 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가는 재화의 보편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도록, 또한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이 완전하게 발전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을 얻도록 공동선에 입각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사목헌장 69항)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된 재화의 보편 목적입니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의 분배는 공동선과 사회 정의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재화는 창조주 하느님께 속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그 재화를 잠시 관리할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라면, 재화가 우상이 되어 인간다움은 훼손되며 완성의 길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우리 몸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눈, 코, 귀, 입… 정답은 내 몸 중 가장 아픈 곳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는 만약 무릎이 아프다 하면,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 몸의 각 지체들이 무릎을 낳게 하기 위해 모든 지체의 에너지를 집중하여 치료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가장 가난한 곳, 관심 받지 못하고 소외된 곳이라고 합니다. 한 사회의 참된 행복과 건강한 사회를 위해 가난하고 소외된 곳의 권리와 행복이 회복되어야 비로소 그 사회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라자로가 우리 집 문 앞에 앉아 있는 한, 정의나 사회적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존엄을 유지하는 권리 행사에 제약을 받거나 그 권리를 주장할 길이 막힌, 힘없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재화를 취득할 수 없거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없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회에서는 하층 구조나 주변으로 밀려나 공정하고도 정당한 인정과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불의한 ‘구조의 죄’에 희생당한 사람들이며 ‘강요된 가난’을 어쩔 수 없이 사는 이들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 5,31)는 스승이신 우리 주님, 예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가르침이며 실천 전통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은 가장 약하고 힘들어하며 고통 받고, 다른 형제들에게 외면당하고 밀려난 자식에게 먼저 애틋한 관심과 사랑을 드러내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자신과 똑같이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으며, 이 책임을 세상 끝 날에 심판받게 될 것이고, 인간의 가난과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제거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덕을 실천함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제나 자매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은 국경, 인종, 피부색, 이념, 종교를 넘어서서 그 차원을 전 세계로 넓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청빈한 삶을 스스로 선택함을 통하여,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고 관대함과 인자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6월호, 이광휘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회교리의 원리들 (3)
사회교리의 원리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원리들 중 ‘인간 존엄성의 원리’와 이 원리에서 파생된 중요한 원리들 ‘공동선의 원리’,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달은 ‘사회 교리의 원리들’ 마지막 시간으로 ‘보조성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와 같은 핵심 원리와 ‘참여와 책임’과 같은 실천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5) 보조성의 원리
지역 본당에서 주일학교 담당사제로 소임할 때를 기억해 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여러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지도신부로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관여하고 참여해서 이끌어나가느냐가 늘 고민이었습니다. 시간과 효율성을 따지고, 경력이나 경험으로도 사제인 제가 그냥 지시해서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면 되겠다 싶다가도, 교사들의 성장이나 자율성과 주도성을 위해서는 한 발짝 물러나서 묵묵히 바라봐 주고, 필요할 때나 도움을 청해올 때 조언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사회의 여러 조직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조정하는 원리로서 사회교리가 오래전부터 제시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이 하고, 그 일을 사회가 대신 맡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며, 하위 조직체가 할 일을 상위 조직체가 대신 해서는 안 되며, 하위 조직체는 상위 조직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은 질서 속에서 사회는 개인이 더욱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상위 조직체는 하위 조직체가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제대로 실현될 때 사회 조직은 질서 있고 조화로우며, 인간다운 공동체로 바뀌고 공동선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존엄이 신장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보조성의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면 상위 조직체의 권력 남용이 방지되고 개인과 중간 단체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보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조성의 원리를 부인하거나 여러 가지로 제한하면 모든 조직의 자치와 자주와 창의력이 제약을 받고 훼손됩니다.
이 보조성의 원리 안에서 국가는 최고의 조직으로서 다양한 하위 조직이 창의력을 발휘하여 자기 일을 스스로 다스리고 처리하며 책임지도록 보조하여야 하지만, 공동선을 위하여 하위 조직이 할 일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의 심각한 불균형과 불의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공동선이 훼손된다고 판단할 때, 더 큰 정의와 평등과 평화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정 기간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6) 연대성의 원리
노동, 정의, 평화 등 사회문제와 관련하여 시민들이 노상에서 농성이나 시위를 하는 경우 사제들이 함께 연대하며 미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나 일들이 있을 때 사제들이 기도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신자분이 길 위의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왜 길 위에서 미사를 드리시나요?” 이 신자분의 질문에 그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제들이 여기, 길 위에서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꾸만 죽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이 의미하는 것은 사제들이 미사를 통하여 기도하고 연대할 때 노동자들이, 억울한 이들이, 고통 받는 이들이 위로받고 용기 내어 절망하지 않으며, 그 투쟁의 길을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인류 가족으로 누구나 존엄하고 평등한 권리가 있어, 성장하고 발전하여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자매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것에서 비롯하는 이 ‘연대성의 원리’는 사회 안에서 개인이 전체에게, 전체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고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연대는 무엇보다도 모두가 모두에게 갖는 책임 의식입니다.”(진리 안의 사랑 38항)
‘연대’는 인간과 사회 집단을 이어 주는 복합 유대로 인간 개개인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완성의 길로 가도록 합니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고 긴밀한 바탕을 이루는 관계가 연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연대성의 원리의 핵심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기심과 욕심, 독점욕으로 기인한 불균형과 불평등의 불의한 ‘죄의 구조’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이나 민족 사이에 새롭게 서로 의존하는 관계의 연대의 구조로 정화되고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대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막연하게 동정하거나 근심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인 공동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강하게 결심하여 투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착취하는 대신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남을 섬기는 도덕적 실천행위입니다. “당신이 협력하기를 중단하면, 당신은 죽기 시작할 것입니다.”(엘리너 루스벨트)
사회교리의 핵심 원리인 ‘연대성의 원리’를 실천하려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과거의 모든 인류에게, 현재의 모든 인류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 과학과 기술, 삶의 양식, 재화, 정신의 유산은 모두 남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사회 전체와 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대’는 초월의 경지까지 뻗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인류와 하나가 되신, 새 인간 나자렛 예수님에게서 연대의 극치를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에 따라 원수하고도 연대하기 위하여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연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연대일 것입니다.
7) 참여와 책임
“참여란 인간이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사회 교류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맡은 일에 따라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 이 의무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우러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13)
‘참여’는 올바른 척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특유의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남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참여를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은, 정의로운 가치에 방향을 맞춘 교육과 정보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치관 속에서 교육받고 거짓 정보와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참여한다면 오히려 사회의 공동선에서 멀어지는 안타까운 참여가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만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연대적인 참여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실체적인 참여는 참여 정의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참여는 단지 선거권의 행사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거권을 넘어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참여든, 정치적 정당 혹은 특정 단체의 참여든 관계없이 사회 참여가 요구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문 능력을 배양해야 하고, 공동선에 따른 공동체의 건설에 협력해야 합니다.
“사회교리를 통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이광휘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0 1,548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