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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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 16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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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5-08 ㅣ No.17224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16,16. 20)


천년도 하루 같이 느껴지실 하느님에게서의 ‘조금’과 시공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서의 ‘조금’은 비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만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16)하는 말씀을 시공간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고 영적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 엄마가 이웃집에 볼일 보러 가시면서 ‘엄마 얼른 갔다고 올게!!’라고 했을 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그 시간은 왜 그렇게도 길게만 느껴졌던지. 시간의 흐름은 항상 일정하고 규칙적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때나 고통 중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그 상태에 따라서 평소와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시간이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고통 중에는 그 시간이 흐름이 느리게 간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아가서 예전 국민학교 시절 소풍 갔던 곳이 사실 별로 멀지 않고, 뛰놀던 운동장이나 교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잖아요. 어쩌면 세월을 통해 우리 마음의 크기 혹 넓이가 그만큼 확대되었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는 의미도 그렇지만 ‘근심이나 기쁨’도 지나고 보면 한순간이듯이 그것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느껴집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듯’ 그렇게 시간을 지날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은 ‘조금 있으면’, ‘곧 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당부에 화답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책은 一切唯心造 곧 만사는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런 마음 먹기의 대표적인 시조가 바로 정조 때의 ‘여선덕의 5刑論’에 반론으로 쓴 「심노숭의 5樂論」에 잘 드러납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눈감고 정신 수양을 할 수 있고, 이가 빠져 연한 것밖에 먹을 수 없으니 위가 편해서 좋다. 다리 아파 못 걸어 집에 편안히 있게 돼 힘 아껴서 좋으며, 귀가 어정쩡해 나쁜 소식 못 들으니, 마음이 고요해 좋다.』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때론 거부와 모독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유스토스와 같은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에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 늘 교차하기에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자기 일에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조금 있으면” (16,16~19) 이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언급합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조금 있으면’과 제자들이 느끼는 ‘조금 있으면’의 시간에 대한 느낌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떠나가실 예수님과 기다리는 제자들의 다른 시선과 자리의 차이로 시간의 흐름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조금 있으면’이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짧은 순간일지 모르지만, 주님을 떠나보내고 남아 있을 제자들에겐 ‘부활’이란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조금 있으면’은 정말이지 길고도 아주 긴 시간이었으리라 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의 깊이는 비례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믿음이요 신앙이기에 제자들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처럼 ‘죽음의 시간과 부활의 시간’, ‘이별과 재회’라는 상반적이고 대조적인 시간과 삶의 이중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차하는 삶의 상황에서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고 떠난다면 더 이상 인간의 肉眼으로 그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전처럼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함과 다시 봄’의 대조는 곧 ‘떠남과 다시 오심’, ‘부재와 현존’을 내포하고 있고 이런 대조는 곧 삶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떠남이 다시 만남이며, 죽는 게 사는 것, 이라는 저 삶의 파라독스! 이러한 모순성을 알아듣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 이 양극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파스카 여정이 단지 예수님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와 유사한 내적 태도와 인식의 전환을 위한 건너감이 요구됩니다. 단지 외적인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우리의 인식 전환을 위한 ‘영적 죽음과 비움’을 체험하고 통과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이 왜 그분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인지를 알게 되리라 봅니다. 이 체험은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충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의문을 주님께 직접 묻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문제를 공유하며 나눕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당혹감을 함께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근심과 불안을 직시하거나 직면하지 못할 때 몰이해는 더 깊은 어둠으로 절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꼭 해답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버려짐, 남겨짐’의 시간이 참으로 유익하고 성숙할 수 있는 가장 의미로운 시간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삶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 여정은 ‘오름과 내림’, ‘충만과 텅빔’, ‘낮아짐과 들어 올림’, ‘죽음과 부활’, ‘부재와 현존의 순간’이 교차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상반성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얽혀 있고 함께 어울려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신뢰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부재의 순간이 가장 강력한 현존의 순간일 수 있고, 죽음의 순간이 곧 부활을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런 내적 태도를 형성하도록 도와줍니다. 

“너희는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슬퍼함은 슬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퍼한 만큼 그 기쁨 또한 강하리라 봅니다.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다시 올 수 없고,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기에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나갑니다.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기뻐할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 는 표현처럼 제자들과 달리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위협적인 존재요 적대자였던 주님의 죽음을 통해 잃었던 백성들의 지지와 세속적인 권위와 권력을 다시 회복할 기회였기에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이치가 한쪽이 밝으면 한쪽은 어둡기 마련이고, 한쪽이 웃으면 한쪽은 울게 되었습니다. 진리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 정의와 자비가 숨 쉬는 세상을 고대하던 제자들에겐 낡은 기득권 세력의 득세는 곧 그들을 더욱 주님의 죽음과 함께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슬펐을 것이고 애통했으리라 봅니다. 다시 어둠과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고 생각할 때 그들의 절망과 슬픔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 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으니, 부활은 멋진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는 역전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드러난 예언의 성취요 실현입니다. 슬퍼하라, 그러면 기뻐할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면 다시 볼 것이다. 오늘 예상하지 않은 슬픔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부디 기뻐하시고 기쁨이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님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곧 희망이며 믿음이고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기다림을 헤아려 주십시오. 지체하지 마시고 사뿐히 다시 오시는 당신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겠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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