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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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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통합적 거룩함

154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2-20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통합적 거룩함

 

 

삶 안에서의 거룩함

 

예수님을 닮는 거룩함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표현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초월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사회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신앙인은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신앙인은 단순히 선행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며, 단순히 내면의 정화만을 위해 노력하는, 일종의 “관념적 성덕을 이상적”(‘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1항)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불의에는 눈 감고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적 수련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다운 거룩함은 언제나 그 본성상 그 자체 안에 실천성을 포함합니다. 이웃 사랑이 포함되지 않는 거룩함은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이원론적 오해

 

진정한 거룩함은 언제나 이웃 사랑을 포함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함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이거나 위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유와 성찰의 차원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차원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이웃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구별해서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유의 순서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을 먼저 성찰해보고, 그 후에 이웃 사랑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신앙인의 인격과 삶 안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참다운 신앙인, 즉 진정으로 거룩한 신앙인이라면 그의 인격과 삶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순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미뤄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동시적입니다.

 

신앙인의 이웃 사랑과 신앙 없는 일반 휴머니즘에서 발생하는 이웃 사랑은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 다릅니다. 휴머니스트의 이웃 사랑은 인간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신앙인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발생합니다. 신앙인의 이웃 사랑은 그 기원과 시작에서 휴머니스트의 이웃 사랑과 다릅니다. 휴머니스트에겐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가능할 수 있지만, 신앙인에게는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앙인에게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 역시 불가능합니다. 신앙인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입니다.

 

 

거룩함은 통합적 사랑에서 발생한다

 

거룩함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단순한 휴머니스트 차원에 머물고 맙니다. 신앙은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단순히 휴머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비정부 기구(NGO)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이웃 사랑은 “주님과 맺는 개별적 관계, 주님과의 내적 결합, 주님 은총에 대한 열린 마음”(‘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0항)과 항상 결합되어 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성인,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 이 위대한 성인들의 “이웃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이고 효과적인 헌신”은 언제나 “기도, 하느님 사랑, 복음 봉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100항).

 

 

거룩함은 편파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하려는, 왜곡된 신앙인들에게 자주 발생하는 오류의 하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이념적이고 편파적인 이해입니다. 이들은 이웃 사랑의 차원을 이념적으로 좁혀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인의 사회 참여를 “피상적, 현세적, 세속적, 유물론적, 공산주의적, 대중 영합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1항). 이들은 “자신들이 수호하는 특정한 윤리 문제나 명분만이” 이웃 사랑의 핵심이고, 다른 사회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101항). 예를 들어, 낙태, 동성애, 사형 제도 문제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다른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회 문제에는 눈과 귀를 닫는 경향이 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혜택받지 못한 이들, 은밀하게 안락사에 노출된 취약한 병자와 노인들, 인신매매 희생자들, 신종 노예살이의 피해자들, 갖가지 형태로 거부당한 이들의 생명”(101항)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기원하는 이웃 사랑은 어느 특정 문제에만 매달리는 편파적이고 이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소수의 일부 사람들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최신 소비재에 빠져 살아가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 가난 안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선택적 생명 윤리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불의에 눈감고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와 태도가 아닙니다(101항). 거룩함은 결코 관념적, 이념적, 편파적인 특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성장의 한계와 세계화의 모순이 발생하자 세상은 점점 민족주의적이고 자국중심주의로 변해갑니다. 사람들은 점점 이민의 상황에 대해, 이민자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기 시작합니다. 신자들 역시 중대한 생명 윤리 문제들에 비하면 이민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러한 자국민 중심주의에 대해 깊은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염려하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맞갖은 유일한 자세는,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거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나그네 안에 계신 당신을 따뜻이 맞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신 요청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마태 25,35 참조)”(‘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2항).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탈출 22,20). 베네딕토 성인 역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따뜻하게 흠숭의 자세로 맞아들였고,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세심하고 각별한 태도로 맞이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2항).

 

환대는 신앙과 영성의 핵심 덕목입니다. 즉, 가난한 이들과 이방인들을 세심하고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 과제입니다. 거룩함은 지역적 편파성과 상대적 편파성을 뛰어넘어 언제나 보편성을 지향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2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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