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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정진석 추기경과 아버지

76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8-14

[허영엽 신부의 ‘나눔’] 정진석 추기경과 아버지

 

 

나는 정진석 추기경님에게 6.25 전쟁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정 추기경에게 평생의 아픈 손가락은 어머니였지만 더 아픈 손가락은 아버지였다고 하신 적이 있다. 사실 정 추기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자랐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하면 “일본에 계시다”라고 얼버무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끔 어머니께도 여쭈어보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정색을 하셨다. 그래서 어느 시간 동안 정 추기경의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금기어(?)처럼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 추기경이 중앙보고 시절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친척들을 통해 우연히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나 외할아버지께 다그쳐 묻지 않은 것은 정 추기경 스스로 어른들에게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참았다고 했다. 정 추기경은 그 후에도 외할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안 하니 더 묻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 추기경은 실제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중앙고보 재학시절 한때 독서클럽에서 무신론에 빠져 헤맸을 때 명동성당에서 윤형중 신부의 교리특강을 듣고 마지막에 가톨릭 사순절 성가 117번 ‘지극한 근심에 짓눌리는 예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무신론을 극복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 오히려 나중에 자신을 살게 해 준 기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6.25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졌다.

 

얼마 후 당시 서울대 공대 1학년이던 19살 정진석 학생에게 7월 초 북한군이 찾아왔고 그는 보안서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부터 보안서에 한참 혼자 놔두더니 지하 작은 방에 가두어놓고 밤새도록 심문을 했다고 한다.

 

질문내용은 주로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억을 했다. 심문하던 사람이 계속 바뀌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대해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반대로 큰소리로 윽박지르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시간은 짐작이 안 가는데 어깨에 별 견장을 단 북한군 장교가 들어와 느닷없이 권총을 뽑더니 정진석 학생의 이마에 대고 쏜다고 했다.

 

 

북한군 보안서에서 아버지에 대해 심문 받아

 

그때 정 추기경은 어린 나이에 스스로 정신이 잃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도 심문에 별 소득이 없었는지 마당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한다. 너무 경황이 없고 겁에 질렸던 정 추기경은 “정신 차려보니 새벽에 보안서 마당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때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면서 옆방에서도 윽박지르며 욕을 하고 구타를 당하는 비명이 계속 들렸는데 그분들의 생사는 모르겠다고 하셨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정 추기경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과 교활함과 야만성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길로 안전에 위협을 느껴 돈암동 친척 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약 2달 넘게 돈암동 친척 집 다락에서 친척 동생과 함께 몰래 숨죽여 지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정 추기경의 동료 중에는 인민군 의용대로 끌려가 낙동강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생을 끝낸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드디어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로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수복이 되기 하루 전날 서울 시내에 많은 폭탄이 날아와 정 추기경이 묵고 있던 집 근처에도 수없이 떨어졌다. 포격이 멈추는가 했는데 한밤중 포탄이 날아와 정 추기경이 숨어있던 친척 집 지붕에서 폭발했다. 그 폭발로 서까래가 무너져내려 바로 옆에 있던 친척 동생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정 추기경은 불과 몇 센티를 벗어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정 추기경은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고 더 이상의 삶은 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대학생들 중에서도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막연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전쟁 동안 동족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몸으로 체험한 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시절 파주에 ‘속죄와 참회의 성당’ 건립에 공을 들인 이유도 서로 용서를 청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민족분단의 비극이 낳은 정 추기경의 아버지

 

그 이후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가능하면 스스로 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추기경 서임 후 정 추기경께서 2006년 2월 말에 아버지에 대한 기사가 모 언론에서 나오자 그제야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정 추기경께서도 기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는 않으셨다. 아버지의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어느 일간지에 1931년에 나온 신문기사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독립운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재판을 받게 된 대학생들의 얼굴 사진 중 한 분이었다. 그때 내가 한눈에 보기에도 아버지의 얼굴이 정 추기경 대학 초기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1931년은 정 추기경이 세상에 태어난 해였다. 옥살이를 하게 된 아버지는 집에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 일부러 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언론 기사대로 아버지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능한 공학도였고, 북한에서 고위직(공업성 차관)까지 지냈지만 결국 북한당국에 의해 숙청되었다. 정 추기경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대와 민족분단의 비극이 낳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 추기경은 서임 후 인터뷰에서 최인호 작가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서 “아버지와 한 번도 같이 못사셨는데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란 개념에 접근하셨나요?”라고 질문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정 추기경은 “사실 그동안 깊이 생각은 못했는데 아마도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개념에 접근했을 것 같아요…”

 

염수정 추기경께서 “김수환 추기경은 아버지,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 같다”란 표현이 새롭게 느껴졌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8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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