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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다 -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거쳐 리카오니아로

515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4-14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다 :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거쳐 리카오니아로

 

 

- 데르베(BiblePlace.com).

 

 

안티오키아로 내려와 신자들을 모이게 해서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편지를 전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계속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오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안합니다(사도 15,36). 1차 선교 여행 때에 말씀을 전했던 곳들을 방문해 자기들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여 제자가 된 이들, 곧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을 만나고 믿음에 충실하도록 격려하자는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의 제안에 동의하고, 두 사람은 출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요한 마르코는 두 사람이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할 때 조수로 데리고 갔던 젊은이였는데, 키프로스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땅 팜필리아 지방 페르게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사도 13,5.13). 바오로는 그 일로 요한 마르코에 대해 마뜩찮은 감정이 있었지만, 바르나바는 여전히 그를 아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바오로에 비해 요한 마르코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공동체에 합류한 인물이었고(사도 5,36 참조), 요한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한밤중에 찾아간 집 여주인인 마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사도 12,12). 그렇다면 바르나바는 이미 예루살렘에서부터 요한 마르코를 알고 지냈을 것이고, 그래서 그를 대동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 킬리키아의 로마시대 도로(BiblePlace.com).

 

 

그러나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은 감정이 격해지고 마침내는 서로 갈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바르나바가 먼저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 버립니다. 키프로스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제일 먼저 말씀을 전한 섬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바오로는 실라스를 협조자로 선택합니다(사도 15,39-40). 실라스는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 회의의 결정을 담은 편지를 바오로와 바르나바 편에 안티오키아 교회로 보낼 때 함께 파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있었습니다(사도 15,22.34-35).

 

 

바르나바와 틀어진 바오로는 육로로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녀

 

바오로와 실라스는 바르나바가 간 방향과는 정반대로 육로를 통해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닙니다(사도 15,41). 시리아는 남으로는 다마스쿠스, 북으로는 안티오키아와 그 일대를 포함하는 지방이고 킬리키아는 시리아와 맞닿은 북쪽 지역으로 바오로의 고향인 타르수스를 수도로 하는 소아시아 땅 남부 지방입니다. 킬리키아에서 타우르스 산맥을 넘으면 갈라티아 남쪽 지역이자 리카오니아 지방인 데르베와 리스트라로 갈 수 있습니다.

 

- 리스트라 이코니온 데르베같은 지명들이 새겨진 돌 기둥(BiblePlace.com).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역에 바오로가 직접 말씀을 선포해서 생겨난 교회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을 담은 편지가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도 수신인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이미 이방인 신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 형제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니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지역의 교회들이 바오로에 관해 알고 있으며 그를 복음 선포자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바오로 일행은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거쳐 리카오니아 지방의 리스트라에 도착합니다. 데르베는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한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고, 리스트라는 바오로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도시였습니다. 리스트라 주민들은 처음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여겨 모시려 했다가 나중에는 유다인들의 사주를 받아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바오로를 쫓아내기 위한 경고의 돌질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돌질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바오로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는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리기까지 했지요(사도 14,11-19). 그렇다면 리스트라는 바오로에게 정말 끔찍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위험한 고을을 다시 찾아간 것은 말씀을 받아들여 믿게 된 제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바오로 자신도 그 제자들 덕분에 리스트라를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사도 14,20).

 

리스트라의 제자들 가운데는 티모테오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스인이고 어머니가 유다인인 티모테오는 라스트라와 인근 이코니온에 있는 신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습니다. 바오로는 그 젊은이를 선교 여정에 함께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티모테오는 유다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풉니다(사도 16,1-3)

 

- 티모테오 성인 벽화, 로마 성바오로 대성전(BiblePlace.com).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곳들을 다시 찾아 그곳 신자들을 격려해

 

바오로의 이런 바오로의 이런 처신은 오늘날 복음 선포자들, 나아가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닌 모든 신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바오로는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면서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아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혈통에 따라 유다인인 티모테오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알려질 경우,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이는 바오로의 선교 활동에도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할례를 강조하는 유다인들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티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고 할 것입니다.

 

실라스 외에 이제 티모테오까지 합세한 바오로 일행은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결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해주며 지키게 합니다. 그래서 그곳 교회들의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 수가 나날이 늘어납니다(사도 16, 4-5). 사도행전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오로 일행이 다닌 고을들에는 이코니온과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가 포함됐을 것입니다. 이 도시들은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 때에 말씀을 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안티오키아를 떠나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한 원래 목적은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곳들을 다시 찾아 그곳 신자들을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바르나바와 틀어져서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지만, 바오로는 자신이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한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 여행을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곧 오늘날의 터키 땅을 넘어 마케도니아 곧 유럽 대륙으로 선교 활동의 범위를 넓힙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바오로 자신이 뜻하는 대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이끄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자세히 살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4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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