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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우리 성인을 만나다6: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221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2-06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6.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 윤영선 작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출 생  1809년 서울

순 교  1839년(30세) 서소문 밖 네거리 / 참수

신 분  동정녀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얻다

 

2월 5일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다. 동정의 삶은 순교만큼이나 경이롭다. 하느님을 믿고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과 부귀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미리 천국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수도자를 부르심은 누구보다 초대된 이에게 영예이겠지만,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천국을 보여주는 선물이다. 아마도 교회가 동정 생활을 순교만큼이나 귀하게 여긴 이유일 것이다. 아가타 성녀의 일대기는 극적이다.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고, 그 서원을 거스르려는 총독의 강요에 순교로 응답했다.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 동정의 서원을 지키려고 순교를 택한 성녀는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얻은 것이다.

 

 

동정 서원 지키며 주님의 나라 선택

 

수도원이 있을 리 없던 우리 박해기에도 동정을 서원하고 천국을 살아간 선조들이 있었다. 순교자 이영희 막달레나도 그중 하나다. 외교인 아버지가 막달레나에게 혼인하기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녀는 동정 서원을 지키려고 몰래 집을 나와 교우였던 고모의 집으로 피신했다.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천주의 가르침 대로 살았다. 이후 박해가 일어나자 스스로 붙잡혔다.

 

“만일 천주님을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장님 앞에서 제가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동정을 서원한 성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님의 나라를 선택했다. 동정과 순교의 월계관을 함께 얻은 것이다. 성녀의 동정과 순교는 나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기억하고,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박해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옛날같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성녀들의 모범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동정과 순교의 영예를 소박하게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향기로운 백합 들고 서 있는 성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미사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동정 순교자 이영희 막달레나가 순교한 곳이다. 지하에 있는 성당과 기념관에서 지상의 야외 공간으로 올라오면 주민 쉼터 공간과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둥근 성체 모양의 돌 위에 새겨진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6)이라는 말씀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그 뒤로 이영희 막달레나 성녀가 맑디맑은 얼굴로 두 손에 동정을 상징하는 향기로운 백합을 들고 영원한 빛을 향하여 서 계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2월 4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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