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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명예 마산시민에 이르기까지 율리오 베르몽 신부

165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3-14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명예 마산시민에 이르기까지 율리오 베르몽 신부

 

 

율리오 베르몽(Julius Bermond / 한국명: 목세영 1881~1967)

 

 

율리오 베르몽은 1881년 2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905년 1월 29일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그해 10월에 한양에 도착했다. 조선어 공부를 한 후 전북 완주 되재본당에서 사목하였다. 그는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에 소집명령을 받았는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 홍콩까지 갔다가 제대 조치를 받고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베르몽 신부는 1914년 9월 7일에 마산포본당으로 오게 되었다. 그동안 이 지역을 사목했던 모리스 카넬 신부가 5월에 목포로 떠나고 몇 달 동안 마산포에 사제가 없었다. 오게 되어 있던 신부와 몇 명의 선교사들과 주교까지 징집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베르몽 신부가 부임했다. 와서 보니 초가지붕에 짚을 섞은 벽토로 지은 소성당과 일본식 작은 집 한 채, 도시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땅을 가진 소학교가 있었다. 30여 개의 공소를 가진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성요셉성당과 사제관 신축

 

베르몽 신부는 공소를 다니며 건물을 신축하고 교우들을 격려하여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1915년 일제는 조선의 종교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포교활동도 허가 외에는 금지시켰다.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간 산에서 화전과 연초 재배, 옹기 생산을 했지만 일제는 조선임야 조사령과 조선연초 전매령을 통해 교우들의 생활을 압박했다. 교우들은 산의 터전을 버리고 도시와 평야지대로 이주했고, 일부는 간도와 일본으로까지 가게 되었다.

 

일제가 종교의 박해를 가했지만 마산포는 교우의 수가 증가하였다. 1926년 5월에는 마산포본당에서 밀양본당(당시 명례본당)을 분가하게 되었다. 마산포성당은 교우가 늘어가면서 성당이 협소해졌다.

 

베르몽 신부는 1928년 석조로 성당을 신축하여 8월에 임시축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1932년에는 교구로부터 일부 보조를 받아 사제관을 짓게 되었는데, 전교활동으로 지친 사제들의 휴양소 역할을 할 수 있게 크게 지었다. 축성식은 6월에 드망즈 주교를 모시고 했다. 이때 성요셉성당 정식 축성식도 함께 거행되었는데, 에밀 타케 신부와 제르만 무세 신부를 비롯하여 여러 신부들도 참석했다. 타케 신부와 무세 신부가 부지를 사들이며 일구어 놓은 노력에 베르몽 신부의 건축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초기 성요셉성당과 사제관

 

 

일제압박을 무릅쓴 역동적인 사목

 

1932년 6월 함안본당이 서기까지 땅을 매입하고 본당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한 베르몽 신부였다. 첫 주임으로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루이스 루카 신부가 부임하여 원활한 사목을 할 수 있게 지원했다. 1932년 10월에 베르몽 신부는 성지학교 건물을 개축하고,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를 초청하여 수녀원을 건립하고 교육과 전교를 맡겼다. 1935년에 중등교육기관 부설로 성지학습회를 만들었다. 베르몽 신부는 아동들의 신심을 배양하기 위해 아동성체전교회를 조직하였다. 아동들이 매일 성당에 모여 15분 동안 죄인들의 회두를 위해 예수성심께 기도하였으며, 매 주일 2전씩 모아 전교회에 보내는 활동을 했다. 이런 활동을 다른 교우들에게도 권유했다.

 

이렇게 28년 동안 사목한 베르몽 신부는 1942년 말 600여 명의 교우를 남기고, 대구 낙산본당(현 가실본당)으로 떠났다. 1942년 5월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징병제를 실시하고 추가로 1943년 10월에는 학도병제를 실시하여 36만 명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서 사제와 신학생까지 학병이나 징병으로 끌고 갔다. 당시 동경 상지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신학생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1944년 1월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일제는 전쟁 막바지 1945년 4월 모든 선교사를 대구교구청 근처의 성요셉성당(현 남산성당)에 감금시켰는데, 베르몽 신부는 낙산성당에 연금되었다. 해방된 8월 15일이 되어서야 가택연금이 풀려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베르몽 신부는 그곳을 떠나 다시 마산으로 오게 되었다.

 

율리오 베르몽 신부 묘

 

 

마산과의 소중하고 긴 인연

 

베르몽 신부가 떠난 후 이종필 마티아 신부가 2년여 사목하던 마산으로 1945년 8월 30일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오게 되었다. 대구대목구는 교회가 운영하는 중등교육기관이 없는 것을 숙고하여 1946년 7월 가톨릭 중학교 설립을 논의했다. 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을 모아 대구 대건중학교, 김천 성의중학교, 왜관 순심중학교, 그것이 기반이 되어 1947년 5월 성지여자중학교 설립에 이르렀다.

 

마산본당 관할구역 조정을 계획하여 마산포는 신마산으로 하고 구마산 본당 분리를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진해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하는 등 베르몽 신부는 교세 확장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율리오 베르몽, 우리이름 목세영 신부는 1948년 9월 마산을 떠나 충남 강경본당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교우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도록 하고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자리를 지켰던 아름다운 일화도 전한다. 그는 이곳에서 15년간 사목하고 은퇴 후에도 강경성당 사제관에서 지냈다. 1967년 9월 12일 86세로 선종하여 대전교구 성직자묘지 하늘묘원에 안장되었다.

 

베르몽 신부는 오랜 시간 마산지역에서 전교한 공로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66년 마산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다. 두 차례에 걸쳐 33년이란 긴 세월을 마산과 인연을 맺어 전심으로 마산을 사랑하며 사목한 잊지 못할 사제이다.

 

▶ 참고 : <천주교마산교구40년사> <완월동성당120년사> 천주교대구대교구 자료, 천주교대전교구 자료, 성지여자중학교 자료

 

[2024년 3월 10일(나해)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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