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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30일 (화)부활 제5주간 화요일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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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17세기 초 나가사키 조선인 신자의 생활과 신앙

166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4-02

[특별기고] 17세기 초 나가사키 조선인 신자의 생활과 신앙

 

 

이 글은 사료와 고증 부분에서 부족한 면이 있으나,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2022년 나가사키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가 있는 동안,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 수집한 내용을 정리하고, 필자의 추정을 가미하여 작성한 글이다. - 필자 주

 

 

임진 · 정유의 왜란과 조선인 포로

 

임진 · 정유의 왜란(1592. 5~1598. 12),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5~10만 명의 조선인 포로가 일본에 끌려왔고, 조선에 출정한 장수가 많았던 규슈(九州) 지역에는 약 3~5만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조선과 교류가 재개되면서, 1607년, 1617년, 1624년의 회답 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비롯하여, 그 후 조선통신사의 왕래를 통해 1600년대 전반 약 6~7천 명 정도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 포로들은 조선에 돌아오지 못한 채 전쟁에 동원되어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에서 자의든 타의든 정착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인쇄공, 석·목공 등 기술자를 비롯하여 도공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출병하고 돌아온 영주들이 조선 도공들의 신분과 생활을 보장하고 우대하면서, 규슈 곳곳에 도요지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사가현의 아리타야키(有田焼) · 가라츠야키(唐津焼) · 나베시마야키(鍋島焼), 나가사키현의 하사미야키(波佐見焼) · 미카와치야키(三河内焼) · 우츠츠가와야키(現川焼), 가고시마현의 사츠마야키(薩摩焼), 후쿠오카현의 아가노야키(上野焼)·고이시와라야키(小石原焼), 구마모토현의 야츠시로야키(八代焼), 야마구치현의 하기야키(萩焼), 그리고 이시카와현의 구타니야키(九谷焼)가 그러하다.

 

 

나가사키 조선인 신자의 기록

 

그러면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선교회의 일본 포교 거점이었던 나가사키(長崎)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과연 어디서 어떠한 삶을 영위했을까? 사료와 고증이 부족하고 단편적이지만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서양 선교사들의 서간과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1594년 파시오1) 신부의 서한을 보면, 일본에 온 조선인들이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자신들의 언어로 교리서와 기도서를 쓰고 집단으로 세례를 받아 그 수가 2,000명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1600년 전후 나가사키 전체 인구수는 약 3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1610년 지랑 로드리게스2) 신부는 조선인 신자들이 신심회(信心會)를 조직하고, 토지를 구입하여 소박한 성당을 짓고 조선인과 일본인 신자들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고 성대하게 축성(祝聖)식을 거행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것이 성 로렌소3) 성당이다. 1620년 마테우스 데 쿠로스4) 신부는 조선인 신자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구금된 그리스탄 동료 신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등 자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인이 세운 성 로렌소 성당은 박해로 대부분 교회가 파괴된 1614년이 아니라 1619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 신자의 거주 지역과 생업

 

1600년대 초 나가사키의 고지도를 보면 가톨릭 신자가 되어 나가사키에 정착한 조선인 신자들은 나가사키의 가지야마치(鍛冶屋), 요로즈야마치(万屋町), 가와다마치(皮田屋), 그리고 나중에 집단으로 이주한 신고라이마치(新高麗町)에서 살았다. 이 세 마을은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지야마치 대장장이, 요로즈야마치 고기 가공과 정육, 가와다마치 사슴 등 동물 가죽의 가공이 주업인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정착해 살았던 조선인은 각 마을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층 노동자로서 부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먼저 대장장이 마을인 가지야마치의 조선인 신자들은 대부분 일본인 대장간의 하급 노동자로 철물의 총포, 창이나 칼 무기 주조 외에 농업과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농기구 및 생활 관련 철 기구의 주물 · 주조 · 수리를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탄 박해 후에는 나가사키 곳곳에 건립된 사찰의 범종과 불상 등을 제작하는 대장장이 일을 생업으로 영위하였을 것이다.

 

가와다마치는 주변을 흐르는 시시도키가와(鹿解川)라는 작은 실개천 이름이 말해주듯이 사슴 가죽을 해체하고 씻는다는 의미이다. 즉 가와다마치에서는 사슴·소·상어 등 대량의 피혁류가 해외에서 수입되어, 이를 가공하여 장식품을 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가죽신, 장갑, 축제나 관혼상제의 정장에 사용하는 허리띠(袴) 등 고가의 가죽 상품을 만들어 오사카(大阪)로 보냈다고 전한다. 1633~1663년간 오란다5) 동인도회사의 아유타야6) 대일(對日) 수출품 중에서 사슴 가죽은 수량 197만 장, 금액으로 53.5%를 차지했을 정도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이러한 가죽은 전량 나가사키를 통해 수입되고 나가사키에서 가공되어 일본 전국으로 유통되었는데, 이에 종사하는 하층 노동자로서의 조선인 신자의 역할은 중요했을 것이다. 요로즈야마치에서는 고래고기 등 정육 가공을 생업으로 했다고 전한다. 조선인 신자의 생업과 노동은 신분적으로 낮은 계급의 일이며, 에도(江戶) 시대의 천민에 해당한다.

 

 

조선인 신자의 신앙생활

 

이렇듯 강제로 고향을 떠나와 생활 기반도 없이 이국에서 하층 노동자, 또는 천민 신분으로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가톨릭 신앙은 가난하지만 어렵고 지치고 힘든 삶을 지탱해 주는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즉 박해가 심해진 1610~1620년대 나가사키의 조선인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데, 심지어 이들은 1620년대 거의 매년 반복된 니시자카(西坂)에서의 그리스탄 처형에 필요한 목재와 도구를 나르고, 형장을 설치하고, 또한 처형된 시체 등 사후 처리도 담당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622년 니시자카에서 그리스탄 55명이 화형(25명)과 참수형(30명)으로 처형된 겐나의 대순교(元和の大殉敎) 때도 마찬가지로, 유명한 「겐나의 대순교도」에는 상투를 틀고 흰 옷차림의 조선인 복장을 한 성인 남자들이 다수 묘사되어 있다.

 

 

 

이들 조선인 신자 중에는 사제를 돕는 이루만(irmão, 수도사)과 도주쿠(同宿, 전도사)는 물론 슈큐슈(宿主), 고모노(小者), 재속 제3회원 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하에 그들은 비밀조직의 신심회인 콘프라리아(Confraria) 등의 활동과 경험을 통해서 규슈,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조선인 신자가 세운 성 로렌소 성당은,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 등 수도회가 세운 규모가 큰 성당은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조선인 신자의 신심 모임을 위한 공소(公所), 내지는 기도소(御堂) 성격을 띤 시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조선인 신자 중에서는 1620~1630년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오늘날 일본교회에는 공식적으로 시복된 조선인 복자가 최소한 10명, 가족관계 등을 감안하면 15명에 이른다.

 

 

성 로렌소 성당의 위치

 

그러면 성 로렌소 교회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나가사키 곳곳에 있던 예수회를 비롯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 여러 수도회의 교회 터는 역사적 기록과 유물 발굴을 통해 그 자리가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 로렌소 성당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직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신고라이마치(新高麗町)가 현재 이세마치(伊勢町)로 바뀌면서, 이곳에 있는 이세노미야(伊勢宮) 신사 자리가 옛 성 로렌소 성당 터라고 주장하는 교회 관계자가 있다. 전해 들은 바로는 한국교회 관계자들이 나가사키현청을 방문하여 이세노미야에 성 로렌소 조선인 성당 터 기념비를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성 로렌소 조선인 성당 터에 관하여 필자는, 지금은 없어져 버린 조선 사찰 류엔지(龍淵寺)의 터를 주목하고 있다.

 

에도 시대의 나가사키 고지도를 보면, 나카지마가와(中島川) 하류의 대장장이 마을인 가지야마치(鍛冶屋町), 이에 인접한 가와다마치(皮田町)와 요로즈야마치(万屋町) 부근에서 다이코우지(大光寺)·다이온지(大音寺) · 난코우지(南光寺)7) 등의 사찰과, 유곽인 마루야마마치(丸山町) · 요리아이마치(寄合町), 그리고 츠시마현의 나가사키 구라야시키(蔵屋敷)8)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고라이교(高麗橋)가 있는 이세노미야 신사 옆에서는, 지금은 도시개발로 사라져 없어졌지만, 당시 조선사찰로 불린 류엔지(龍淵寺)를 확인할 수 있다.

 

『나가사키시사 신사부(長崎市史神社部)』에 따르면, “겐키 · 덴쇼(元亀·天正) 시대에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신사가 파괴되고 여러 해를 거쳤지만, 1628년에 신고라이마치에 관아의 요청을 받고 신사를 재건했다.”라고 적혀 있다. 원래 있던 이세노미야 신사는 그리스탄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다시 신사가 재건된 것이다. 즉 그 자리에 성 로렌소 성당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나가사키시사 불사부(長崎市史佛寺部)』의 자료를 보면, “류엔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1631년 그리스탄 종문진멸(宗門殄滅)을 계기로 관아의 허가를 받아 이세마치에 사찰을 창건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흥미로운 점은, 이 류엔지가 당시 조선과 유일한 통상 교역 창구였던 쓰시마번(對馬藩)의 지시를 받아, 조선에서 표류한 어민을 수용하고 조사하고 귀국하는 동안 보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고, 표류민이 죽을 경우에는 유골을 안치 공양하는 ‘조선 사찰’(朝鮮寺)이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조선인과 연고가 있는 조선 사찰 류엔지(龍淵寺)가 있던 자리가 성 로렌소 성당 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일본 가톨릭 역사 속 조선인 신자 - 순교자, 배교자, 밀고자

 

박해시대 일본교회 역사 속에서 조선인 신자들은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중에서 순교자, 배교자, 밀고자의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한다. 먼저 순교자로는 예수회 이루만(irmão, 助祭)으로, 나가사키 · 마카오 · 중국 대륙을 오가며 조선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한 빈센트 가운(1580~1626)을 빼놓을 수 없다.

 

[순교자] 빈센트 가운은 1580년생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가신 히비야 효에몽(日比屋兵右衛門, 세례명 빈첸시오)의 영지 아마쿠사 시키(熊本天草志岐)에서 성장했다. 1593년 13살 때 모레혼(Pedro Morejon, 1562~1639)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수회 세미나리오에서 교리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선교사를 대신해 설교할 수 있는 도주쿠(同宿)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612년부터 7년간 중국 및 조선 선교를 위해 중국에 파견된 다음 나가사키로 다시 돌아왔다. 가운은 특히 요한 로드리게스9) 신부가 중국 각지의 선교지를 시찰하고 선교 활동을 하는 데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운은 1619년 마카오로 파견되었다가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와 일본 내 선교 활동의 지도적 역할을 하다가 시마바라(島原)에서 체포되었고, 결국 예수회 일본 관구장 토를레스 신부 및 졸라(J.-B. Zola) 신부와 함께 1626년 화형으로 순교한다. 가운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예수회의 체계적인 교육과 육성을 통해 성장하고, 일본은 물론 중국 대륙 및 마카오로 파견되면서 중국과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활동한 수도사 이루만이었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한가지 주목하고 싶은 점은 빈센트 가운과 허균10)과의 접점 가능성이다. 허균이 사신으로 중국에 체류한 기간 중 많은 학자와 시문 교류를 하면서, 진귀한 서적과 경전을 입수하여 조선으로 보냈는데, 이 중에는 서양 지도와 천주교 성가, 기도서 등과 함께 천주교 한역 서학서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배교자] 조선인 신자 중에는 살기 위해 배교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가와사키야(川崎屋助右衛門)와 이케모토(池本小四郎)가 그 사례인데, 1642년 나가사키 히라도마치의 호적 기록(平戸町人別生所糺)에 이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가와사키 스케에몽은 1583년 조선 태생으로, 1595년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포로로 히젠 오카야마(備前岡山)에 잡혀 온 소년이다. 1614년에도 막부의 금교령이 내려지던 해 나가사키 소토우라마치(外浦町)로 이주해서 32세에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박해로 인해 배교하고, 불교 잇코우슈(一向宗)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거주지나 가와사키야라는 상호로 볼 때, 당시 나가사키에서 후나야도(船宿), 즉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중국인 등 외국 상인을 대상으로 숙박이나 상품의 하역 · 운반 · 검사 등에 관여하면서 생업을 꾸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밀고자] 마지막으로 조선인 신자 중에는 박해가 심해지면서 서양 선교사, 일본인 사제 및 수도자 등을 밀고하면 받을 수 있는 거액의 포상금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밀고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최초의 일본인 사제인 기무라(木村) 세바스티안11) 신부를 밀고한 조선 여인이 있었다. 신상과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나가사키 하마마치(浜町)에 살던 조선 사람으로, 가톨릭 신자인 안토니오 고우라이의 하녀로 일했다. 보상금이 탐나 안토니오 집이 기무라 세바스티안 신부의 숨은 은신처라고 관아에 밀고하였는데, 이 또한 기구한 조선인 포로의 운명이다. 참고로 1600년대 초 그리스탄 시대에 서품받은 일본인 방인 사제는 총 38명에 이른다.

 

 

맺음말

 

나가사키는 한국 신자가 많이 찾는 성지순례 코스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나가사키에 남아 있는 조선인 신자들의 흔적을 찾는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일본교회의 일이라고 무관심하지 말고, 함께 그들의 발자취를 찾고, 무엇보다 성 로렌소 성당 터를 하루빨리 확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인터넷 카페(https://cafe.naver.com/nagasakidiary) 글을 참조 바란다.

 

 

참고문헌

 

루시오(L´ucio) · 오카 미호코(岡美穂子) 공저,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中公選書, 2021.

나가사키 히라도마치 호적기록(平戸町人別生所糺)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인신매매·노예·납치의 일본사』, 가시와(柏)서방, 2014.

가타오카 야키치(片岡弥吉), 『일본 그리스탄 순교사』, 토모(智)서방, 2010.

나카다 고토코(中田琴子), 『인도시나 반도 사화(史話)』, 리후레 출판, 2020.

안노 마사키(安野真幸), 『교회령 나가사키』, 고단샤선서, 2014.

시마다 류토(島田竜登), 「근세 일본 샴(태국)무역사 서설」, 2006.

다케노우치 가즈아키(竹之内一昭), 「근세 아시아의 피혁, 일본의 피혁무역」, 1999.

나가모리 미츠노부(長森美信), 「임진/정유난의 조선 포로(被擄人)」, 『천리학보』 7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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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란치스코 파시오(Francesco Pasio, 1554~1612) :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2) 지랑 로드리게스(Girão Rodrigues, 1559~1629) :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3) 성 라우렌시오(Laurentius)의 일본식 발음.

4) 마테우스 데 쿠로스(Mateus de Couros, 1569~1632) :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예수회 일본 관구 부관구장.

5) 오란다(オランダ, 阿蘭陀) : 네덜란드의 영어식 이름인 ‘홀란드’의 일본식 표기.

6) 아유타야(Ayutthaya) : 태국의 두 번째 왕국의 수도.

7) 조선 문자로 쓰인 동찰(棟札)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실물을 찾을 수 없다.

8) 쓰시마번의 공물이나 특산물을 보관하고, 관리가 상주하는 창고 겸 가옥 시설이다. 현재 쥬하치신와긴코(十八親和銀行) 본점이 있다.

9) 주앙 추주 로드리게스(João Tçuzu Rodrigues, 1561~1633) :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회계 책임자. 1610년 일본에서 추방되어 1613~1615년 중국 각지의 선교지를 시찰하고 선교 활동을 펼쳤고, 조선 사신 정두원(鄭斗源, 1581~?)과도 만났다.

10) 허균(許筠, 1569~1618) : 임진왜란 이후 1608년, 1610년, 1612년, 1614년, 그리고 1615년 북경을 다섯 차례 사신으로 왕래하였다.

11) 기무라(木村, 세바스티아노, 1566~1622)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平戶)에서 거처한 집안 출신으로, 160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교회와 역사, 2024년 2월호, .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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