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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8: 밀정 조화진

134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2-1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8) 밀정 조화진


신자로 위장한 밀정 조화진에 의해 내포 교회 핵심 세력 궤멸

 

 

탁희성 화백이 그린 복자 방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밥상. 「벽위편」과 「정조실록」에 한차례 씩 니오는 방백동과 방 프란치스코가 동일인물로 보인다.

 

 

자세히 보아 두라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잠깐 주춤했던 교세가 1794년 이후로 날로 커져갔다. 특별히 호서(湖西) 지역은 풀뿌리 교회의 저변을 확장해가며 온 마을이 한꺼번에 신자촌으로 변하는 등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가 실패로 돌아가자, 장용영(壯勇營)의 별군직(別軍職) 선전관(宣傳官)에게 비밀스런 기찰(譏察) 명령이 자주 떨어졌다. 기찰 포교들은 그들 내부에 밀정을 심거나 각종 감시망을 동원해 신부의 자취를 바싹 쫓았다. 신부의 종적은 묘연했다.

 

신부가 충청도로 숨어든 것 같다는 보고까지 올라가자, 임금은 이때를 전후로 충청 감사와 충청 병사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을 면밀히 염탐하여 하나하나 붙잡아 형벌로 다스릴 것을 특별히 명했다. 하지만 이 일은 조보(朝報)에도 실리지 않아 대부분 그 정황에 대해 몰랐다.

 

1798년 12월 1일, 정충달(鄭忠達)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던 날이었다. 임명장을 받고 떠나는 인사를 올리려고 어전에 엎드린 그에게 임금은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임금이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아 두거라.” 정충달이 그의 얼굴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이자, 임금이 다시 명했다. “아니다. 두 번 세 번 자세히 보거라. 다른 곳에서 만나더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정충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충달이 홍주 병영에 도착한 얼마 뒤 한 사람이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불러보니 대궐에서 임금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조화진(趙和鎭)이었다. 그는 풍양 조씨 중에서도 명문의 위세가 대단하던 이른바 청교 조씨의 서족(庶族)이었다. 그는 임금의 특명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키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조화진은 사학을 염탐하여 철저히 다스리라는 임금의 밀유(密諭)를 소매에서 꺼내 정충달에게 전했다. 전후 사정은 「벽위편」에 자세하다.

 

황사영의 「백서」에도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을묘년에 주문모 신부를 놓친 뒤로부터 선왕의 의구심이 날로 깊어졌다. 몰래 염탐하고 비밀리에 기찰하는 것을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신부의 종적은 알지 못했다. 이에 조화진이란 자를 시켜, 천주교를 믿는 것으로 가탁해서 충청도 지역의 사정을 탐지케 하였다. 마침내 1799년 겨울 청주의 박해가 있었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저도 신자입니다

 

한 사람의 밀정을 투입해서 서학이 극성하던 충청도 교우의 핵심 세력을 거의 궤멸시켰으니, 성과가 참 대단했다. 보이지 않게 그를 돕던 별동 조직의 존재도 느껴진다. 교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포교를 통해 성장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자면 먼저 자기 쪽을 열어야 했다. 작정하고 연구한 뒤에 달려든 밀정 앞에 열어야만 하는 신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밀정 조화진의 행동은 어떠했을까? 조화진은 족제비 꼬리를 몇 개씩 달고 다니며 필공(筆工) 행세를 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다가 주문을 받으면 그 집에 머물며 붓을 매주었다. 붓은 소모품이어서 어디서든 수요가 있었다. 양반 집 사랑은 붓을 매는 척 염탐하기가 좋았다. 각종 행상 노릇도 했다. 구석진 마을을 다니며 옷감이나 기름, 젓갈과 실 또는 빗 같은 생활필수품을 파는 보부상들은 당시 전국 어디에나 흔했다. 실제 천주교 신자들의 포교도 이같은 생활밀착형 행상을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여러 구역을 돌아다니며 안면을 텄고, 질 좋고 값싼 물건으로 환심을 산 뒤, 어려움을 도우며 포교했다.

 

조화진은 미리 파악해둔 천주교 신자의 집을 타겟으로, 이 마을 저 동네로 다니며 낯을 익혔다. 슬며시 성호를 그어 자기도 신자라는 표시를 하며 그들에게 접근했다. 관심을 보이면 경문을 입으로 외워 보였다. 순박한 촌사람들은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는 신자로 대접받았다. 때로 그들의 집회에 참석해서 조직을 염탐하고, 교세를 파악했다. 이따금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 주는 역할도 맡았다. 마을별 사학 조직의 동태와 지역별 지도자 조직, 서학책의 숫자에서부터 집회는 언제 어느 집에서 열리고, 한번 모일 때 모이는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꼼꼼히 염탐하고 또 기록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과 달리 향촌은 주거가 한정되어 이같은 파악이 더 용이했다. 한번 그물에 들면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 결과 조직 계통이 환히 드러나고, 공격 목표가 분명해지면 그는 중간중간 편지로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비밀리에 보고했다. 절대로 자신이 직접 병영에 연통하지 않았다. 병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음성 현감 노숙(盧)으로 하여금 중간에 사람을 보내 우회 보고를 올리게끔 했다. 다 미리 짜둔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고도 혹 문제가 생길까 봐 이들은 집회 날에 맞춰 천주교 신자 조직을 급습해 체포할 때, 일부러 조화진까지 함께 검거하는 술수까지 부렸다. 그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신자들과 함께 신문하고 시늉으로 매질도 해서 그들의 의심을 차단했다. 신심이 약한 신자들이 배교를 다짐하고 풀려날 때, 그는 슬그머니 묻어 나왔다.

 

함께 잡혀갔던 신자들은 그를 제 편이라고 더 믿게 되었다. 그는 전처럼 다시 마을을 다니면서 병영에 잡혀가서 겪은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 나게 늘어놓았다. 이런 꼼꼼한 술책 때문에 충청도 교회 조직은 내부의 첩자가 조화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동안 그가 다닌 곳마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해당 지역 교회 조직이 뿌리째 흔들렸다.

 

앞에서 박취득을 홍주에서 해미로 내려보낸 일을 말했는데, 당시 내포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은 해미의 진영(鎭營)으로 끌려가서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많았다. 해미에는 충청좌군영이 있었다. 당시 천주교인의 검거는 행정 책임자인 충청 감사와 군사 책임자인 충청 병사가 함께 진행했다. 그래서 앞서 김필군의 경우처럼 서로 간에 성과를 높이려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다. 충청 병사 정충달은 1798년 12월 1일에 부임해 1800년 8월 18일 회령 부사로 이임할 때까지 1년 9개월 동안 조화진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들여, 해미에서만 100명이 넘는 핵심 신자들을 죽였다. 교회 조직에서도 끝에 가서는 자신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밀정이 조화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달레는 면천 배관겸 프란치스코를 밀고한 것도 조화진이었다고 썼다.

 

어떻게 이룩한 교회였던가? 밀정 하나 때문에 전체 교회가 붕괴 직전에 이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해서 이를 갈며 복수를 생각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붙들려 간 천주교인이 조화진을 지목했다. 입을 맞춘 조직적인 음해에 그는 여러 달 고문을 당했다. 이때는 충청 병사 정충달과 음성 현감 노숙도 타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고, 새로 온 관장들은 조화진의 정체를 잘 몰랐다. 애초에 그는 비선(秘線)에 속해 있어서 조정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감옥에서 끝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벽위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한편 달레는 “내포 지방에서는 조화진이라는 배교자가 밀고하여 많은 교우를 죽게 하였는데, 박해가 끝난 뒤에도 그 흉악한 생활과 강도질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법망에 걸리게 되자 자살하고 말았다”고 조금 달리 썼다.

 

복자 방 프란치스코 초상화.

 

 

방백동의 천주교 신자 명부

 

김이영(金履永, 1755~1845)은 1799년 11월 17일에 충청 감사로 내려왔다. 이때 보령(保寧)에서 천주교 신자 방백동(方百同)이 붙잡혀 왔다. 방백동은 「벽위편」과 「정조실록」에 한차례 씩 나온다. 그는 체포될 때 작은 책자 한 권을 압수당했다. 책 속에 유력한 천주교 신자의 성명이 적혀 있었다. 이가환과 정약용 형제, 홍낙민, 이기양 등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일반 상민과 천민의 이름까지 100명이 넘었다. 1801년 3월 11일에 정언 이의채(李毅采)가 올린 상소문에도 “작년에 호서(湖西)에서 사당(邪黨) 방백동(方百同)을 잡아들이고 그 비감(秘龕) 가운데 기록된 바를 수색해 보니 제일 먼저 이가환이 기록되어 있고 다음에 이일운(李日運)이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다고 합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책자를 보고 놀란 김이영은 비밀 공문과 함께 책자를 밀봉해 임금께 보고했다. 정조는 이 책을 이익운(李益運)에게 보여주었다.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李明鎬)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다산과도 아주 가까웠다. 이익운은 화들짝 놀라 그들 내부에 이 소식을 알렸다. 말이 금세 돌아,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 숨은 자가 많았다. 역시 「벽위편」이 전하는 소식이다.

 

여기 나오는 방백동은 아무래도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정산필 베드로와 함께 순교하기로 약속했던 복자 방 프란치스코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다. 방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 김이영의 비장이었다. 달레는 방 프란치스코가 1798년 12월 16일에 죽었다고 했는데, 방백동의 죽음은 1799년 말 또는 1800년 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려면 사망 시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조는 사학을 엄하게 다스려 교세의 확산을 차단했다. 다만 조정 관리에 대해서만은 스스로 사학을 끊고 임금의 교화에 따르게 하려는 기조를 유지했다. 이가환과 정약용 등은 이 때문에 여전히 벼슬길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었다. 1797년 이래로 충청도 교회는 밀정들의 밀고와 관장들의 참혹한 탄압으로 지도부는 와해되고, 조직은 붕괴되어 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2월 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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