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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35: 멜로초 다 포를리의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교황

134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2-11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5) 멜로초 다 포를리의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교황’


르네상스 문화 융성의 불씨를 지피다

 

 

멜로초 다 포를리,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교황’, 1477년, 피나코테크, 바티칸 박물관.

 

 

역사는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중세 역사와 최종 단절하는 것으로 보고 1453년을 중세의 끝이라고 하고, 근대의 시작을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1492년으로 보기도 한다. 서방 세계에서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로 인해 서방은 르네상스가 한층 풍성해졌고, 그 영향은 교회 안팎에도 미쳤다.

 

 

르네상스 정신 불어넣은 교황

 

비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인문주의 교황으로 등장한 사람은 델라 로베레 가문 출신의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였다. 학문과 예술, 도시 재정비사업 등 인문주의의 확장과 공공사업 지원 정책으로 로마에 르네상스 정신을 불어넣은 교황이었다.

 

그는 형제들이 많았다. 4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 15명의 조카가 있었다. 재위 중 34명을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6명이 그의 조카들이었다. 친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율리오 2세 교황), 외조카 피에트로(28살에 사망)와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포목상 출신의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이몰라(Imola)와 포를리(Forl)를 지배하도록 했고, 조반니 리아리오를 로마시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으로는 족벌 정책을 쓰고, 밖으로는 명분도 성과도 없는 전쟁을 부추겨 장화 반도의 여러 공국끼리 싸우게 해 반(反) 교황주의를 낳게 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업적으로 보는 것은 그의 인문학적 유산들이다.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로마 시대 예술 작품들을 기부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이후 교황들이 예술품을 후원, 수집, 기부하는 선례가 됐다. 식스토 4세가 기부한 예술품들은 현재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의 규모를 확충하고 도서 목록을 풍성하게 했다. 독일의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원래 이름은 Johannes Mller von Knigsberg) 주교를 로마로 불러 율리우스 달력의 수정을 자문했고, 플랑드르에서 활동하던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 1440~1521)를 로마로 초대해 시스티나 소성당 합창단을 창설했다.

 

그는 당시 교회로부터 상당한 독립을 보장받고,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고 특히 인문과학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파도바대학교 출신이다. 그 역시 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예술은 물론 과학 후원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교황이 된 후, 칙서를 통해 지역 주교들에게 범죄자 및 신원 미상의 시신들을 의사와 예술가들에게 연구용으로 제공할 것을 지시했다. 식스토 4세 덕분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티치아노의 제자인 얀 스테판 반 칼카르는 획기적인 해부학 교재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발간해 의학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교회적으로는 1439년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확인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을 장려해 12월 8일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로 선포했고, 묵주기도를 장려함으로써 한 세기 후 성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최고의 마리아 기도로 승격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 그의 이름으로 지은 시스티나 소성당도 원래 ‘성모 승천 소성당’으로, 그의 마리아 신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시 재건 사업과 인문주의 부활

 

식스토 4세가 시작한 토목 공사는 바티칸에서 가까운 산토 스피리토 병원 복합 건물을 새로 짓는 일이었다. 1471년 화재로 전소하자 즉시 재건했다. 또 로마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테베레 강의 수질을 정화하기 위해 수로를 복구하고, 로마 시대 이후 아무도 세우지 않았던 다리를 새로 건설해 ‘시스토 다리(Ponte Sisto)’라고 했다. 바티칸 사도궁에서 천사의 성까지 ‘시스티나 가(街)’를 만들고, 바티칸 박물관 내 ‘시스티나 소성당’을 지어 피렌체 거장들을 불러 양쪽 벽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세의 생애’를 그리도록 했다. 당시 피렌체를 이끌던 로렌조 마니피코는 기를란다이오, 페루지노, 보티첼리, 시뇨렐리, 로셀리 등 문화사절단을 보내 식스토 4세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1478년 ‘파치가의 음모 사건’ 이후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하고, 이후 마니피코의 두 아들(삼남과 양자)을 성직에 입문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두 아들이 훗날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다.

 

식스토 4세는 로마 교구의 서른 개가 넘는 성당을 재건하기도 했다. 성 비탈레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도 이때 복구됐다. 식스토 4세 덕분에 변두리에 불과했던 바티칸 언덕이 보르고 거리를 통해 로마의 중심지가 됐다. 1477년,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캄피돌리오 시장을 정리하고, 주랑 현관을 해체했으며, 1480년에는 고대 로마 이후 처음으로 도로를 확장하고 대대적인 포장 공사를 했다.

 

식스토 4세의 이런 ‘도시 재건’ 사업에는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있었던 것처럼, 인문주의 지식인이 필요했다. 1479년 교황청 상서원의 ‘서기관 회의’와 ‘로마 학술원’은 이런 취지에서 부활시켰다.

 

전임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464~1471)은 인문주의 사고(思考)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자들로 구성된 서기관들을 모두 파직하고, 예술가와 문인들의 활동을 막았다. 당시 문인들은 대부분 로마 학술원 소속의 인문주의자들이었고, 교황의 이런 처사에 분노했다. 바르톨로메오 사키(Bartolomeo Sacchi, 흔히 플라티나 Platina로 알려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편지를 써서 수감됐다가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지만, 교황에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재수감됐다. 교황은 로마 학술원 회원들이 이교도적인 이상을 가졌다고 해 모두 체포, 투옥, 고문했다. 플라티나는 저서 「교황들의 생애(Vitae pontificum)」에서 바오로 2세의 인품을 형편없는 것으로 묘사해 로마 지성계의 큰 공감을 얻었다. 바오로 2세는 결국 로마 학술원을 해체했다. 그것을 식스토 4세가 부활시켜 인문주의자 폼포니오 레토(Giulio Pomponio Leto, 1428~1498)에게 책임을 맡기고, 니콜라오 5세, 비오 2세 교황들로부터 내려오던 바티칸 도서관의 체계를 확고히 해 초대 관장으로 플라티나를 임명했다.

 

 

교황청 전담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순간, 식스토 4세 교황이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i Giuliano degli Ambrosi, 1438~1494)가 그린 프레스코화다. 포를리(Forl)라는 지방 출신이라, 흔히 ‘다 포를리’라고 부른다. 바티칸 도서관 벽에 있던 것을 벽체 오려서 현재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크에 있다.

 

멜로초는 어린 시절 포를리에서 조토학파 사람들과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의 영향을 받으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로마와 우르비노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식스토 4세의 교황청 전담 화가(Pictor papalis)가 됐다. 1478년 12월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거장들과 함께 예술인학교를 설립했고, 그것은 후에 ‘성 루카 아카데미아’로 발전했다.

 

그 시기,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요청으로, 로마에 알템프 궁을, 이몰라에 여러 건물과 포를리에 리아리오 궁을 설계했다. 로레토의 거룩한 집 성지 내 ‘성 마르코 제의실 돔 내부 천장화’와 로마의 성녀 프란체스카 로마나 대성당에 ‘교부들’을 그렸다. 1494년 고향 포를리에서 숨을 거두고, 그 지역 ‘삼위일체 성당’에 잠들어 있다.

 

 

그림 속으로

 

바티칸 도서관은 1475년 로마에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다. 플라티나는 무릎을 꿇고 식스토 4세 교황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장엄한 순간이라는 것은 배경이 말해준다. 식스토 4세는 우측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모두 그의 조카들이 있다. 우측에는 교황청 서기관 라파엘로 리아리오가 있고, 앞에는 훗날 율리오 2세 교황이 되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서 있다. 플라티나 뒤에는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조반니 델라 로베레가 있다.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임명장을 받는 플라티나는 오른손 검지로 아래에 펼쳐진 식스토 4세에게 헌정한 문장을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전, 도로, 시장, 성벽, 다리를 배치하고/ 트레비의 ‘처녀의 샘’을 복원하며/ 고대의 뱃사람 조각상들로 항구였음을 드러냈어라/ 식스토와 바티칸은 자신을 둘러싼 도시를 발전시켰노라/ 세속에 숨어 애도하던 내게, 저 유명한 도서관의 한자리를 수여하였어라.”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2월 7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6/Melozzo_da_Forl%C3%AC_0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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