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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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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27: 관계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가장 선한 본질이며 사랑

152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1-25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7) 관계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가장 선한 본질이며 사랑

 

 

-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눈과 믿음과 관상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말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감인 것이다. 그림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성인이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① 삼위일체 하느님과 관계성 안에서의 인간 이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관계성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들은 서로 간의 관계성 안에서 삼위이시지만 사랑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감과 뜻을 발견하였던 이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클라라의 회칙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늘의 지존하신 아버지께서 지극히 복되신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회개 생활을 하도록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황송하옵게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이 회개하시고 조금 지난 후 나는 나의 자매들과 함께 그분에게 자원하여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클라라의 수도 규칙」 6,1-2)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의해 인도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삶과 설교를 통해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도 클라라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매우 의미 있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그들은 상호 교환과 관계성의 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누가 여기에서 선생인가?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가? 둘 다이다. 둘 다 선생이고 배우는 이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뭔가를 배워갔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다. 그들은 관계성 안에서 살아갔고, 이 삶을 묵상하고 관상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어려움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을 보고는 필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여인들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감화(영감)를 받았고,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들의 삶을 보고 놀랐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성령의 활동을 그들 안에서 감지하였다. 나는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눈과 믿음과 관상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말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감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끌어 주셨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믿음과 관상의 자세 안에서 이를 감지한 것이다.

 

 

주님의 영과 거룩한 활동 마음에 간직해야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집중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 10,8)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 믿음과 관상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관계성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며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는, 이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관계성 안에서 얻게 된 상처나 고통마저도 하느님의 본질인 관계성 안에 내재하는 참된 질서, 즉 사랑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신뢰할 때 그런 어려움마저도 결국은 진정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가장 선한 본질이며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사랑의 힘이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과 영성에서 다 같이 말할 수 있는 ‘통일장’ 혹은 ‘사랑의 힘의 영역’이다. 언뜻 보게 되면 세상은 비극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이렇게 혼돈 안에서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깊은 곳에는 그 무엇도 멈추거나 막을 수 없는 내부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외부로는 하느님과 창조 사이에 사랑의 들고 나는 영원한 흐름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곳은 아마도 아무렇게나 풀과 나무가 자라고 낙엽이나 나뭇가지들이 혹은 다른 자연의 부스러기들이 널브러져 있어 심지어는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돈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곳은 무질서한 곳일 수 있지만, 자연의 질서에서 본다면 그곳은 이미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죽음(부패와 소멸) 역시도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질서 속에 있을 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24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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