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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7일 (수)부활 제3주간 수요일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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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이야기: 유럽, 축성생활에 눈뜨다 - 암브로시오 · 아우구스티노

64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6-23

[수도원 이야기 - 유럽, 축성생활에 눈뜨다] 암브로시오 · 아우구스티노

 

 

“동쪽에는 세속의 모든 것과 떨어져서 고결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군. 그 사람들 대단하다는데 혹시 자네는 그 소문 들었어?”

 

 

서방 교회 축성생활의 시작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에서 태동한 축성생활(봉헌생활)에 대한 소문은 유럽 대륙의 신앙인들에게 전해졌다. 소문은 곧 관심으로, 관심은 곧 ‘따라 하기’ 열풍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5세기 말이 되면 사막에 기원을 둔 동방의 금욕주의가 서방에 이식되는데 그 언저리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왼쪽 사진 참조)이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한 번에 큰 강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앞선 이들이 놓은 돌다리를 하나씩 디디며 건너기 마련이다. 아우구스티노도 한 번에 강을 뛰어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앞서 놓인 돌다리에 돌 하나를 보태었다.

 

아우구스티노 앞에 돌다리를 놓은 이들은 베르첼리의 에우세비오 성인과 암브로시오 성인, 놀라의 바울리노 성인 등이다. 이 가운데 에우세비오는 성직 수도회를 첫 번째로 창설한 인물이다. 축성생활에 성직 생활을 융합시킨 것이다. 이는 암브로시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축성생활의 원형

 

서기 340년, 박해가 막 끝난 평화의 시기, 암브로시오는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지적 성취가 남달랐던 그는 성장하여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탁월한 사람은 언젠가는 주목받기 마련이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언변에 대한 소문은 로마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암브로시오 주교가 이교도였던 아우구스티노를 신앙으로 인도하는 모습(밀라노 성 암브로시오 대성당), (아래) 성 아우구스티노의 석관(이탈리아 파비아 산 피에트로 인 치엘 도로 성당).

 

 

정치권에서도 암브로시오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는 마침내 밀라노 총독 자리에 오른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법계에서 주목을 받다가 정치권에 발탁되어 도지사에 당선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고는 종교계의 수장으로 새롭게 급부상한다.

 

당시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정립되기 전으로, 이단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이때 밀라노 주교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곧이어 후임 신발 문제로 심각한 잡음이 일었다. 우여곡절 끝에 암브로시오는 374년 12월 7일, 34세가 되던 해에 세례성사를 받고 주교직에 오른다.

 

지식인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뒤 열정을 다해 직무에 임했다. 그의 업적은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여기서는 축성생활과 관련한 내용만 살펴보고자 한다.

 

암브로시오의 삶은 오늘날 수도자들 삶의 모범이다. 그는 모든 성직자에게 금욕적 쇄신을 요청했다. 스스로도 금욕적 축성생활을 철저히 견지했는데, 기도와 렉시오 디비나, 형제들에 대한 봉사에 노력했다. 단식을 실천하고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특히 신학 정립에 힘썼다. 그는 또 교리 연구와 강론에 전념하여, 가는 곳마다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사와 전례에 관한 그의 다양한 저술은 오늘날 교회를 가능하게 한 초석이 된다. 암브로시오는 자선 실천에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내어 주었다. 오늘날 수도회들의 다양한 카리스마가 모두 그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인 셈이다.

 

암브로시오의 삶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저서 「동정녀」(De virginibus) 등은 많은 여성 성소를 이끌어 냈으며, 밀라노, 베로나 등지에서 많은 남녀 수도원이 설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 전경.

 

 

서방 교회 축성생활의 아버지

 

이 과정에서 축성생활과 관련하여 위대한 영적 아버지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티노이다. 그는 친구 알리피오 성인과 함께 387년 4월 13일 파스카 성야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을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88년부터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축성생활을 시작했다. 기도, 단식, 선행을 하는 이 공동체는 남자 수도 공동체로서 철저한 관상 생활을 하였다.

 

이후 391년 그는 이 공동체를 알리피오에게 맡기고 히포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얼마 뒤 알리피오는 공동체의 생활을 규정한 10개 항목의 간단한 「수도 규칙서」(Ordo Monasterii)를 가져오는데, 아우구스티노는 첫머리와 끝부분에 영성에 관한 자신의 말을 덧붙여 인가해 주었다. 사제품을 받고서도 사제 생활과 축성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던 그는, 396년 히포의 교구장이 된 뒤에도 계속 축성생활을 하였다.

 

400년경 「계명집」(Praeceptum)을 작성했고 이후 이 두 개의 규칙서가 필사되어 유포되었는데, 놀라의 바울리노를 통해 이것들이 「규칙서」(Regula, 종종 Regula ad servos Dei[하느님의 종 규칙서]로도 알려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이 규칙서는 서방 교회에서 첫 축성생활 규칙서로 일컬어지는데,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도 겸손,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 이 규칙서가 그리스도교 축성생활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느님과의 친교,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 사도적 가난과 헌신, 봉사와 친절의 마음 등이 모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마닐라 성 아우구스티노 대성당.

 

 

규칙서 구성은 1장 축성생활의 목적과 공동체 생활, 2장 기도 생활, 3장 음식과 청빈, 4장 정결, 5장 공동 소유 문제, 6장 형제애, 7장 장상, 8장 끝맺음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행과 단식, 정결에 대한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공동체를 위해 할 것이며 자신을 위한 개인 일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기쁘게 할 것이다. … 개인의 것보다 공동체의 일을 더 염려하는 그만큼 너희가 향상됨을 깨달아서, 영원히 남을 사랑이 지나가 버릴(현세 생활) 필요에 쓰일 모든 것을 압도하도록 할 것이다”(「봉헌생활의 기원」, 허성석 엮음, 분도출판사. 2015).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사도 4,32-35 참조)를 지향하는 이 규칙서는 뒤이어 나올 「체사리오 규칙서」와 「베네딕토 규칙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축성생활과 관련한 아우구스티노의 저작은 이밖에도 히포의 수녀 공동체에 보낸 편지(편지 210과 211번), 수도 사제들에 관한 글(강론 355, 356번), 「수도승의 노동」(De opere monachorum), 「거룩한 동정 생활」(De sancta virginitate) 등이 있다. 또한 고백록(Confessiones)에 나타난 축성생활 관련 내용도 중요한데, 사제로서의 축성생활, 주교로서의 축성생활 등을 꼽을 수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동생이 지원병으로 나갔으면 형은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이때의 모범(模範)은 ‘본받아 배울 만한 대상’이다. 그런데 한자를 바꿔 동음이의어 모범(暮帆)을 만들 수 있다. ‘저녁에 돛을 달고 가는 배’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말과 글, 삶 전체를 통해 서방 축성생활의 모범(模範)이었다. 또한 그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큰 돛에 의지해 파도를 뚫고 우리보다 앞서 항해한 배, 곧 모범(暮帆)이었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이다. 1998년 입회하고,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로마 ‘이디 제약회사’(IDI Farmaceutici)의 이사, 알바니아 NSBC 가톨릭대학교 부설 병원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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