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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님을 만나 절을 많이 하셨나요?(정진석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75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6-07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님을 만나 절을 많이 하셨나요?(정진석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 정진석 추기경님 하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촛불이 그 불빛을 다하고 꺼져가듯이 정진석 추기경의 숨결이 점점 옅어지고 끝내 사라집니다. 그는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어요. 처음에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한밤중에 서울성모병원에 달려갔을 때 힘겹게 바라보시고는 말씀하셨지요. “미안해”

 

이 한마디는 정 추기경의 성격과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죠. 정 추기경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꽁꽁 무장되어있었어요. 정 추기경은 겉으로는 근엄하고 딱딱해 보이시지만 조금 지나다보면 겸손하시고 솔직하시다.

 

제가 홍보실에 발령을 받고 얼마 후 처음 보고를 드릴 때였어요. 그때 정 추기경은 대뜸 내용보다 뒷장을 먼저 보셨어요. 그리고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왜 이면지를 사용 안했어?”

“아~~네 다음번엔 꼭 이면지를 사용하겠습니다.”

 

알고 보니 이면지 사용을 너무 강조하셔서 어떤 부서는 일부러 이면지를 만들어 보고서를 드린다는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음에 또 이면지가 아닌 종이에 보고서를 드렸더니 바로 이면지 사용을 문제 삼으셨어요. 나는 “이면지를 쓰면 오히려 인쇄기가 일찍 고장납니다. 그러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인거죠”라고 말씀드렸어요. 정 추기경은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좋아~ 그럼 다음부터는 이면지를 쓰지마” 하셨어요. 정추기경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라도 반대의견이 합리적이면 자신의 생각을 금방 바꾸셨어요. 실제로 나이 들고 상사인 어른들이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해요.

 

어느 가을 정 추기경이 회의가 끝나고 주교관 입구로 내려가다 멈추고 감나무를 올려다보았어요. 그해 가을에도 명동성당의 그 나무는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어요. 그때 마침 계성여고 학생들이 재잘대며 지나가자 정 추기경은 소녀들에게 이 가을의 기분을 전해주고 싶으셨는지. “얘들아, 땅만 보며 떠들지 말고 하늘을 보고 감나무도 봐! 가을을 느껴야지?” 그러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큰 소리로 대꾸했어요. “할아버지나 많이 느끼세요! 우리가 알아서 느껴요!” 예상치 못한 소녀들의 반응에 정 추기경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그래,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것, 바로 취소다!” 정 추기경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그러자 소녀들은 휙~ 추기경을 쳐다보더니 까르르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지금도 그 나무를 보면 어린 소녀들에게 기꺼이 져주던 정 추기경의 환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아요.

 

 

6.25 전쟁 중 곁에서 세 번 죽음을 목격한 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

 

정 추기경은 4월27일 선종 즉시 약속하신 대로 각막 기증을 위한 안구적출 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병원의 수녀님들이 제의를 입혀드렸어요. 명동대성당으로 정 추기경님의 시신이 운구 되었고 밤 12시가 되자 성당에 조종이 울렸어요. 신부님들에 의해 제대 앞으로 운구가 되었고 유리관으로 옮겨졌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정 추기경의 이마를 짚었는데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어요. 마치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나는 유리관을 덮기 전에 정 추기경의 주교관을 씌워 드렸어요.

 

정 추기경은 평소에 어머니를 호칭할 때 늘 “엄마”라고 하셨어요. 한번은 제가 버릇없이 “추기경님, 보통 나이 드신 분은 엄마라고 안하는데 늘 엄마라고 하세요?” 그랬더니 정 추기경님은 “어~그래 내가 엄마라고 했어?” 하시는 거예요. 그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셨던 거지요. 그만큼 어머니는 정 추기경에게 늘 함께하는 분이셨지요.

 

정 추기경은 대학 1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 돈암동 쪽 친척집에서 3개월을 숨어 지냈어요.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서울수복 며칠 전 한밤중 포 공격에 친척집 지붕이 무너지면서 옆의 사촌동생이 세상을 떠났지요. 그리고 서울수복 후 1950년 12월말에 군대에 차출되어 줄지어 한강을 건너다 바로 뒤에서 얼음이 꺼져 대여섯 명이 청년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어요. 문경새재를 넘다가 앞에 가는 사람이 지뢰를 밟아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셨어요. 이 세 번의 큰 사건은 공학도로서의 꿈을 버리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큰 이유가 되었어요.

 

“하느님은 왜 나를 살려주셨을까? 나는 내 생명을 이제 덤으로 사는 거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제의 길을 가는데 한 가지 걸림돌은 바로 어머니였지요. 어려서부터 외동아들인 자신만을 보고 홀로 살아온 어머니에게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오랜 고민 끝에 허락하셨어요.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 에미는 걱정하지 말고 네 뜻대로 하렴!”

 

그 후 아들이 사제가 되고 훗날 주교가 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오롯이 말년까지 생계를 위해 부평에서 삯바느질을 쉬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틈틈이 죽은 이들을 염해주며 봉사하셨어요. 어머니는 사제의 삶에 사사로운 가족의 일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남에게 피해를 안주려는 마음은 모자가 꼭 닮았어요.

 

어머니가 70대 중반이 되어 노환으로 이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정 추기경은 여러 번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으로 돌보셨잖아요? 이제는 어머니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셔도 되요. 다른 이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사랑이에요.” 그제야 어머니는 살림을 정리하고 음성 꽃동네로 이사했어요.

 

그러던 중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아들에게 “사람이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시며 사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고 며칠 후 잠자듯 세상을 떠났어요. 정 추기경은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의 안구 적출 수술을 곁에서 지켜보았어요. 어머니가 남기고 간 두 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빛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었지요.

 

정 추기경도 어머니의 모범에 따라 2006년 사후 장기기증서에 서약했어요. 2018년에는 다시 연명 의료계획서에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서명했어요. 만약 나이가 많아 장기기증이 효과가 없다면 안구라도 기증해서 연구용으로 사용할 것을 청원하셨던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을 거예요. 2006년 추기경 서임이 발표된 직후, 한 취재기자가 불쑥 질문했어요. “만약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 추기경은 한참 후 입을 떼었어요. “엄마를 만난다면, 절을 하고 싶어요. 끝없이, 아주 많이”

 

정 추기경님! 어머님을 만나 절을 많이 하셨나요?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6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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