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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거룩한 삼위일체(제7장)

70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10-02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거룩한 삼위일체(제7장)

 

 

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대해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하겠으며,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에 대해서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제7장 레지오 단원과 거룩한 삼위일체

 

레지오 마리애가 맨 처음 취한 단체 행동이 성령께서 오시도록 그 이름을 불러 기도를 바침으로써 성령께 말씀을 건네고, 이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과 그분의 성자께 나아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마찬가지로, 몇 년 후 벡실리움의 도안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똑같은 특징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성령께서는 벡실리움 표장 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 계셨던 것이다. 벡실리움의 도안이 신학적 고찰이 아닌 예술적 착상에서 나온 것임을 미루어볼 때 이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벡실리움은 비종교적 표상인 로마 군대의 깃발을 받아들여 마리아 군단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었다. 독수리 대신 비둘기를 넣고 황제나 집정관의 얼굴은 성모님의 모습으로 대치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완성된 구도는 성령께서 생명의 은총을 세상에 내리시는 통로로 성모님을 사용하시면서 레지오를 장악하고 계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 후 뗏세라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에도 성령께서 레지오를 품어 보호하신다는 똑같은 신심의 자세가 드러났다.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악의 세력에 맞서는 끝없는 싸움이 완수된다. 이때 동정녀께서는 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시고 성모님의 군단은 예언된 승리를 향해 진군하는 것이다.

 

덧붙여 레지오의 색깔이 예상했던 푸른색이 아니고 붉은색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정황이다. 이는 벡실리움과 뗏세라의 그림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후광을 어느 색으로 하느냐 하는 사소한 세부 사항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레지오의 상징을 통해 성모님은 성령으로 가득하신 분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는 성모님의 후광을 성령의 빛깔로 채움으로써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레지오의 빛깔 역시 붉은 색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뗏세라의 그림에서도 성모님은 성령과 더불어 휘황찬란하게 타오르는 성서 속의 ‘불기둥’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역시 동일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레지오 선서문을 작성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소 의외로 생각되었지만, 선서는 성령께 하는 것이지 레지오의 모후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관된 생각이 유지되었다. 이로써 이미 앞에서 살펴본 그 중요한 특징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즉 가장 작은 개별 은총을 베푸시는 일까지 포함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성령이시고 이를 대행하는 분은 언제나 성모님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성모님 안에 역사하심으로써 영원하신 성자가 사람이 되셨다. 이로써 인류는 거룩한 삼위일체와 결합되고, 성모님 자신은 각 위격(位格)과 독특하고도 구분되는 관계에 놓이신다.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일이 특별한 은총이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적어도 성모님의 이 세 가지 특별한 위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인들은 하느님의 세 위격을 구분하여야 하고 각 위격에는 그에 맞갖은 존경을 드려야 한다고 집요하게 강조한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이러한 요구와 관련하여 강경하고도 위압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근거를 창조와 강생의 궁극 목적이 삼위일체의 영광이라는 사실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알아듣기 힘든 신비를 희미하게라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총을 성모님께 자신 있게 청구할 수 있다. 성모님에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결정적으로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주님 탄생 예고’(the Annunciation)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순간에 일어났다.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대천사를 통하여 당신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마리아에게 드러내셨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 계시에서 하느님의 세 위격 모두 또렷하게 명시되고 있다. 먼저 성령으로, 그분께는 강생을 이루시는 일이 맡겨졌다. 두 번째는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장차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이시다. 세 번째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루카 1,32) 바로 그 아기이시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각 위격과 다른 방식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세 위격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제2위격에 대하여 마리아가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인 어머니로서의 관계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모성은 보통의 인간관계를 한없이 능가하는 그러한 친밀감과 영속성과 특성을 지닌 모성이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경우 영혼의 결합이 주된 것이고 육체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육체가 분리되었을 때조차 두 분의 결합은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강도와 친밀함 속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구원 사업에 협력하고(Co-Redemptress) 은총을 중재하는 분(Mediatress)이시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제2위격의 “협조자”(helpmate)가 된다고 교회에 의하여 선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제2위격과 같은 분”이 된다고 선언될 수 있다.

 

성령과의 관계에서 마리아는 흔히 ‘성령의 궁전’ 또는 ‘성령의 지성소’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성령께서 마리아를 당신 자신에 결합시키시어 품위에서 당신 다음가는 분으로 만드셨다는 현실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당신 안에 받아들이시어 당신과 하나로 만드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셨기에 성령은 마리아의 영혼 그 자체와 같으시다. 마리아는 단순히 성령의 활동의 도구나 통로가 아니다. 마리아가 행동을 취할 때 성령께서도 행동을 취하시고 마리아의 중재가 거부된다면 성령의 중재도 거부될 정도로 마리아는 성령과 함께 일하는 지성적이고 깨어 있는 협력자이다.

 

성령은 사랑, 아름다움, 힘, 지혜, 순수이시며 하느님께 속한 그 밖의 모든 것이시다. 성령이 풍부하게 내리시면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충족될 수 있으며, 아무리 고통스러운 문제라도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것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을 협조자로 모시는 이는(시편 77편) 전능의 파도를 타게 된다. 그처럼 성령을 끌어들이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가 성모님이 성령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라면,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진정한 한 위격으로 구분되는 분으로서 우리에 대하여 당신만의 고유한 사명을 지니신 분임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일이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 마음을 꽤 자주 성령께 향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다. 성령께서 계신 쪽으로 눈길 한 번 주는 것만 포함시킨다면,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모든 신심 행위가 성령께로 나아가는 넓은 길이 될 수 있다. 레지오 단원들은 특히 묵주기도를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묵주기도는 그 기도가 우리의 모후께 바치는 주된 기도라는 이유 때문에 성령께 바치는 최고의 신심 행위를 구성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묵주기도에 담긴 20개의 신비는 성령께서 구원의 드라마에서 행하셨던 중요한 개입들을 기념하고 있다.

 

마리아가 영원하신 성부와 맺고 있는 관계는 흔히 딸로서의 관계로 정의된다. ‘딸’이라는 칭호가 가리키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가) “모든 피조물 중 으뜸, 하느님께서 가장 기꺼워하시는 자녀, 하느님께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자”(뉴만 추기경 Cardinal Newman)라는 마리아의 지위.

 

(나)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고 있는 충만한 결합. 이 결합을 통하여 마리아는 성부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 때문에 신비적인 방식으로 성부의 딸이라 불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다) 마리아가 성부와 빼어나게 닮은 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처럼 성부와 현저하게 닮아 있기 때문에 마리아는 사랑하는 성부에게서 분출되는 영원한 빛을 세상에 베푸는 데에 적합한 자기 되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마리아는 성부와 일종의 인척 관계를 이룬다.”(레피시에 추기경 Cardinal Lépicier)

 

그러나 ‘하느님의 따님’이라는 이 칭호는 마리아가 성부와 맺고 있는 관계가 성부의 자녀요 마리아의 자녀인 우리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을 충분히 깨닫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과 그 아드님의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을 낳을 힘을 마리아에게 주시기 위하여, 단순한 피조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의 큰 비옥함을 그녀에게 전달하셨다.”(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부께 대한 마리아의 관계는 모든 영혼에게 생명이 흘러 전달되도록 하기 위하여 항상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감사와 협조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그러한 결합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주제로 삼아야 한다. (후략)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0월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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