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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4: 연암 박지원과 이희영 형제

133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1-1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4) 연암 박지원과 이희영 형제


실학자 박제가, 서양 선교사 초빙을 정조 임금에게 진언하다

 

 

-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려준 박제가 초상화. 군관 복장을 하고 갓을 쓴 모습이다.

 

 

박지원과 박제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8세기 조선의 대문호였다. 한 시대의 문단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가 「열하일기」 한 꼭지를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은 숨죽여 기다렸고, 또 환호했다. 박지원은 1780년, 44세의 나이로 연행을 다녀왔다. 늘 이점이 궁금했다. 그는 북경성당에 가서 서양 문물을 직접 보았고, 마태오 리치의 묘소까지 찾아갔었다.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그와 북학을 주장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그의 그룹들은 서학에 대해 어떤 속 생각을 품었을까? 덮어놓고 배척하고, 무조건 사갈시(蛇蝎視) 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박제가는 당색이 다른 정약용과 유난히 가까웠고, 이벽이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를 남겼다. 박제가의 경우 정약용과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의 종두법 실험까지 함께했던 것을 보면,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서학에 대한 박제가의 속 생각 또한 다산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학에 노출될 기회는 중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다산 주변보다는 연암 그룹 쪽이 훨씬 더 많았다.

 

1786년 1월 22일, 정조는 조정의 모든 신료들에게 국가의 시무(時務)를 거침없이 진언(進言)하라는 옥음을 내렸다. 박제가는 이때 올린 글에서 파격적으로 과감한 문호 개방과 중국과의 자유 무역을 주장했다. 물류의 자유로운 이동과 정보의 유통으로 경제를 살리고 속된 유자들의 고루한 식견을 깨뜨려야 한다고 외쳤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국가에서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에 정통한 서양인 수십 명을 초빙하여 건축술, 광산 채굴법, 유리 굽고 화포 설치하는 법, 관개 제도와 수레 및 배 건조법 등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들이 천주교 신자들인데, 그 틈에 이단이 들어오면 어찌하느냐는 우려에 대해 박제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 무리 수십 명을 한 곳에 거처하게 하면 난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끊은 채 먼 나라를 여행하며 포교하는 것만을 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가 천당과 지옥을 독실하게 믿어 불교와 차이가 없지만, 후생(厚生)의 도구는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를 가져오고 그중의 하나를 금한다면 옳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저들에 대한 대우가 적절치 않아, 불러도 오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박제가는 어떻게 이런 말을 임금에게 올릴 생각을 했을까? 몇 차례 중국 연행을 통해 직접 견문한 확신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주장이었다. 박제가의 서학에 대한 이해는 누구보다 분명했다. 이 글을 쓴 1786년 1월은 명례방 을사추조적발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였다. 서양 선교사 수십 명을 초빙해서 이들을 통해 이용후생의 도구를 조선에 도입하자! 이것이 유명한 박제가의 「병오소회(丙午所懷)」란 글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신념이 천주교 포교에 있음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박제가는 과연 조선이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정보만 얻어내고,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신앙은 차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미 조선에는 가깝게 지내던 정약용 등에 의해 천주교 신앙이 사회 저층을 파고들고 있던 시점이었다.

 

 

연암 그룹과 이희영 형제

 

예수상을 잘 그렸던 화가 이희영의 친형 이희경(李喜經, 1745~?)은 무려 다섯 번이나 북경을 왕래했던 실학자였다. 이희경과 이희영 형제는 연암 박지원의 제자였다. 형제는 박제가, 이덕무 등과 늘 어울려 다녔다. 젊은 날 박제가의 문집 속에는 이희경 형제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연암의 임종을 지켰던 것도 이희경이었다. 이희경은 당시 자타가 인정한 중국통이었다.

 

그런데 그의 자취는 어느 순간 통째로 사라졌다. 죽은 해조차 알지 못한다. 당시 그의 위상으로 보아 이럴 수는 없다. 이희경의 문집 「윤암집(綸菴集)」은 일본 천리대학에 유일본의 필사본으로 그것도 일부만 남았다. 북학의 또 다른 보고서인 이희경의 「설수외사(雪峀外史)」 역시 일본 동양문고에 누구의 저작인지도 모른 채 묻혀 있었다. 저자가 밝혀진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의 아우 이희영이 천주교 신자로 사형당해 죽은 뒤, 이희경의 자취 또한 흔적 없이 지워졌다. 여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곡절이 숨어 있다. 그는 박제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으로 잊혀졌다.

 

박제가는 이희영에 관한 글도 남겼다. 박제가의 문집 「정유각집(貞閣集)」에 수록된 「십삼서루(十三書樓)」란 작품이 그것이다. 십삼은 이희영의 형 이희경의 별호다.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젊은 시절 함께 엮어 중국으로 가져가 사가시(四家詩) 돌풍을 일으켰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같은 시의 제목이 「추찬의 서루에 들러(過秋餐書樓)」로 되어 있다. 추찬은 이덕무가 지어준 이희영의 자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원래 이희영을 위해 써준 시였는데, 뒤에 그가 천주교 신자로 죽는 바람에 시를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자기 검열을 통해 제목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희영은 형 이희경의 요청을 받고 형의 책에 농기도(農器圖)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 사실이 박제가의 「북학의」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역시 막상 현전하는 대부분의 필사본 「북학의」에는 이희영의 이름이 말소되고 없다. 다산이 자신의 문집에서 천주교와 관련되어 죽은 인물 관련 기록을 철저하게 지워버렸던 것과 같다. 그 결과 남은 기록에서 이희영의 존재는 거의 미미해졌지만, 생전의 위상마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박제가가 쓴 「추찬의 서루에 들러」는 다음과 같다. “암담함 속에서도 계절은 밀려들어, 봄 오자 며칠 동안 바람만 끊임없다. 솔바람 파도 소리 빈집을 에워싸고, 눈 기운 자옥하게 허공에 쌓여있네. 처사가 수북에서 살려 한 것 아니니, 고인은 원래부터 성 동편에 숨는다네. 한 해가 다 가도록 무엇을 얻었던가. 초목과 충어의 같고 다름 견줘볼 뿐.(氣候潛推淡中, 春來數日不禁風. 松濤滅沒圍虛屋, 雪意升沈貯碧空. 處士終非居水北, 高人元自隱牆東. 窮年兀兀吾何有, 草木魚較異同.)” 그를 고인(高人), 즉 고상한 사람으로 높였고, 성 동편에 숨어사는 은자에 견주었다. 궁한 살림 속에 그는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 초목과 벌레, 물고기의 같고 다름을 연구하며 지낸다.

 

 

연암을 찾아온 김건순

 

이희영이 근 10년간 식객으로 머물던 여주 김건순(金建淳)의 집안은 노론의 성골이었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수장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제사를 맡아 올리는 봉사손이었다. 게다가 그는 천재였다. 아홉 살에 벌써 선도(仙道)에 뜻을 두었다. 김건순은 마태오 리치의 「기인십편(畸人十編)」을 즐겨 읽었다. 10여 세에 「천당지옥론」을 지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20세가 되자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 그가 여주에서 한 번씩 상경하면 큰 구경이 났다. 유력한 인사들이 그와 만나보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 소문을 듣고 연암도 그를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 김건순이 1796년 어느 날 불쑥 제 발로 연암을 찾아왔다. 김건순이 어떻게 연암을 찾아왔을까? 제자 이희영이 주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희영은 김건순에게 연암을 꼭 만나 보라고 권했을 테고, 김건순은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고 그가 궁금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기대에 차서 그를 맞이했던 연암이 그가 떠나자 문득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왜 그러시냐고 묻자 연암이 말했다.

 

“내가 그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더니라.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가엾은 생각뿐이로구나. 그의 재주는 천하의 기이한 보배라 할 만하다. 천하의 기이한 보배를 간직하려면 단단하고 두꺼운 그릇이 있어야 부서지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가 있다. 내가 그의 그릇됨을 보니, 이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부족하더구나. 아! 안타깝다.”

 

연암은 잠깐의 대화로 이 보석 같은 청년의 눈길이, 결코 가닿지 못할 먼 곳을 향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나라에 재앙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過庭錄)」에 이 일을 기록하고, 끝에 이렇게 썼다. “얼마 못 가 김건순은 그릇된 부류와 사귐을 맺어 폐해지고, 5년 뒤에 천주교에 물들어 죽임을 당했다.”

 

김건순은 1797년 11월, 강이천(姜彛天, 1768~ 1801)의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었다. 바다 섬에 사는 진인(眞人)이 군대를 이끌고 건너와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풍문이었다. 진인이 군대를 싣고 온다는 큰 배가, 당시 조선 신자들이 북경 교회에 그토록 청원했던 서양배와 겹쳐지면서, 곧 큰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흉흉한 소문이 시국을 강타했다. 그 배가 오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릴 것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얻고, 신분제도의 족쇄도 풀릴 것이었다.

 

여기에 이희영을 매개로 한 주문모 신부와의 접촉까지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이제 「정감록」 신앙을 신봉하는 역모 집단과 한통속으로 몰렸다. 이 일로 노론도 발칵 뒤집혔다. 강이천과 김건순, 이희영에 얽힌 이야기는 아직도 풀어야 할 내용이 많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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