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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파라오의 딸,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여인

75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7-02

[레지오 영성] 파라오의 딸,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여인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시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심하면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만약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무서워하셨다면 성모님은 주님의 뜻에 “아멘!”(Fiat) 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임은 항상 세상과의 싸움을 전제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없는 사람 안에서는 주님의 뜻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탈출기에서 강물에 떠내려오는 아기 모세를 맞아들여 살릴 수 있는 여인은 ‘파라오의 딸’밖에 없었습니다(탈출 2장 참조). 그녀만이 유일하게 파라오의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경에서 강과 바다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걷다가 믿음이 약해졌을 때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세상은 두려움의 힘으로 우리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파라오는 모든 인간을 짓누르는 ‘세상의 힘’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때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세상에 속한 이들도 세상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노아 때의 ‘홍수’는 심판을 나타내는데 물속에 빠지면 죽는 것이고 방주에 들어가 물에 뜨면 살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이들은 죽고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이들은 삽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의 돛을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 이 세상을 잘 항해하는” 배이며, “홍수에서 유일하게 구해주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5항)

 

여기서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모세를 넣어 강에 떠내려 보낸 ‘상자’는 “테바”라는 같은 히브리 단어입니다. 테바는 또한 ‘계약의 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십계명 판이 계약의 궤 안에 들어있듯, 모세가 상자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과의 중재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듯, 그리스도도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가장 완전한 모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93항 참조).

 

따라서 모세를 맞아들인 파라오의 딸은 곧 그리스도를 맞아들인 성모 마리아를 상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모세는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이 파라오를 두려워하였다면 히브리 아이를 살려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셨지만, 그 모범은 먼저 세상을 이기신 어머니에게서 배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길밖에 없어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세상을 이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세상을 이기는 힘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길밖에 없습니다.

 

어떤 상인이 말을 잘하는 앵무새 때문에 큰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상인이 앵무새를 잘 대해 주었지만, 앵무새는 새장에 갇혀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점점 자유가 그리워졌지만, 상인은 앵무새를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 앵무새가 날아와 상인의 집 창문에 앉았습니다. 상인은 그 앵무새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앵무새는 놀라서 그런 건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새 장의 앵무새도 놀라서 머리를 꺾고 죽었습니다.

 

상인은 너무 슬픈 나머지 자신의 앵무새를 묻어주려고 밖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앵무새가 다시 살아나더니 나무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나뭇가지 위에는 아까 죽은 줄 알았던 그 앵무새도 앉아있었습니다. 그 앵무새는 어떻게 상인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찾아왔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세상에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것은 반응이 없어서 세상의 어떠한 유혹도 그 죽은 것을 잡아놓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라고 말하고, 또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묻혔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죽은 사람만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성남에서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김하종 신부’가 있습니다. 이분은 성모 마리아의 용맹함으로 그리스도의 상처와 같은 이들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가 가난한 이들에게 몸을 바치기로 한 하나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의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믿음으로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극복하게 만드시는지 그 첫 체험이 나와 있습니다.

 

1992년 김 신부가 성남의 한 독거노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많이 낡고 오래된 집이었고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방바닥에는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누워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20대 때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옆집 사람들이 기억해서 주면 먹고 아니면 굶고 있었습니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기에 아저씨의 요강을 정리하고, 방 청소와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 후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생생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김 신부는 이 음성이 예수님의 메시지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특별히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듯 자신보다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하는 눈을 주어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만듭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담대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내가 그 두려움을 껴안고 죽을 때 비로소 나와 함께 죽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여인”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고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로서 교회를 지키십니다. 세상의 유혹자가 보기에 성모 마리아는 마치 진을 친 군대처럼 무서운 여인이십니다. 누구도 성모님 품에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해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자녀이지만 만약 세상을 무서워하면 세상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더는 세상이 무섭지 않다면 세상이 나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우신 어머니 마리아를 본받는 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7월호, 전삼용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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