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학자료

sub_menu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아동학대)

18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1-25

[신학 칼럼]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정인 양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분노가 크다. “#정인아 미안해” 해시태그 운동과 부모인 장씨, 안씨에게 살인죄 적용을 요구하는 청원이 이어지고 있으며,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각종 정책 마련을 촉구하는 제안들도 쏟아지고 있다. 그 작은 몸이 멍들고 부서지고 깨지고 끊어질 때까지 폭행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범죄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악질적이고, 그에 대한 공분은 당연하며, 이러한 아동학대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강화하는 일은 물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가 아동학대 ‘근절’로 이어지려면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

 

아동학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깊고 오래다. 부모의 학대와 폭력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수많은 정인 양들의 이야기는 알려진 것보다 잊혀진 것이 더 많다. 지난 2020년 10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9년 아동학대 주요통계’에 따르면, 2019년 한 해에 학대로 숨진 아동은 42명에 달하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제한적인 1세 미만의 아동들이 절반에 가까운 19명(45.2%)이다. 42명의 아동을 살해한 가해자는 53명으로 이 중 친부모가 46명이다(2021년 1월 14일 오마이뉴스 기사 “수많은 ‘정인이들’ 절반이 1세 미만…그럼에도 집행유예 나오는 까닭” 참고). 아동 폭력을 포함한 가정폭력은 팬데믹 발생과 더불어 더 빈번해지고 더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자 오히려 폭력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부모들이 악하기 때문일까?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동 폭력은 사랑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폭력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 정당화되어 왔던 가정 내 권력이 폭력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흔히 아이에 대한 ‘애정’을 일컫는다. 이 애정은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정의, 즉 사랑을 신비화하는 관념에 맥락이 닿아 있다.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이성을 초월하는 사랑, 끊임없이 샘솟아 마르지 않는 사랑만이 ‘진짜’사랑이라 믿는 관념말이다. 이때의 사랑은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스레 우러나는 감정으로 감각과 느낌과 직관에 좌우되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애정을 주고 보살피는 것만이 사랑의 표현이며 의무라 믿게 한다. 그러나 감정에 몰두하는 것은 사랑의 한 요소일 뿐이다. 화학작용과 같은 그 신비로운 감정은 똑같은 강도로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또한, 자신이 누군가와 강력한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게 하는 사랑은 이성과 의지, 행위 결정 능력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행동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소유와 집착, 지배와 복종까지도 열정적 사랑의 표현으로 용인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학대를 하면서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말하며, 분명 잘못된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식에 대한 점검보다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자타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애정만으로 지탱해온 사랑에서 그 애정이 약해진다면,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남는 것은 강자와 약자의 권력관계뿐이다. 정인 양을 입양하며 자연스레 ‘정이 붙기’를 기대했던 장씨가 그 감정이 생기지 않자 결국 저지른 범죄를 보라. 낭만적인 사랑이 지배하는 친밀 관계는 폭력에 위태롭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사랑과 폭력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문화, 아이를 지배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문화이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벨훅스(bell hooks)는, 정신 의학자 스캇펙(Scott Peck)의 이야기를 빌어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저 신비로운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의지를 통해 나와 상대의 성장과 확장을 기도하며 매 순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감정은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지만 행동은 우리의 의지로 결정되고, 결과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기에 반성과 변화와 성장이 수반된다. 이러한 사랑은 당사자 둘만의 관계에 국한될 수 없고 사회적 관계망,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아이를 부모나 어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며 아이가 가진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인정하도록 돕는다. 의지와 책임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사랑은 자연스레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학습에 의해 배워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또한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환경이 우선 조성되어야 한다. 

 

불편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낭만적인 사랑의 관념은 친밀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뿐 아니라, 신앙공동체 또한 위협한다. 생각해 보라. 낭만적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지배적인 관념으로 작용하지 않는가?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 회심의 첫 체험, 그 강렬한 감정의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불안해하며, 뜨거운 그 느낌이 식으면 나약해지고 신앙의 활력을 잃었다고 상심한다. 하느님에 대한 낭만적인 열정은 신앙의 동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신앙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예수를 알고 사랑하고 그이를 닮아 사는 삶은 의심과 실망과 무기력과 혼돈의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한 평생의 여정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여름 밤의 뜨거운 낭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기 위해 기어코 사람이 되었고 이에 따른 죽음까지 받아들였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예수의 그 사랑, 그 선택을 우리 일상생활의 윤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인 사랑의 관념에 지배되어 있는 신앙공동체는 사랑하라는 말은 늘 주문처럼 읊지만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권력과 폭력의 문제를 무시하고, 의지와 책임의식을 마비시키며, 단지 사랑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우리라 가정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유독 교회에서, 혹은 그리스도교 유사종교에서 성폭력, 아동 성폭력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잘못된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조민아 마리아 교수(조지타운대학교)]


0 1,380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