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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푸른 꿈이 서린 마을 묘재, 푸른 꿈을 살던 남상교

193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6

[순교자 성월 특집 IV] 푸른 꿈이 서린 마을 묘재, 푸른 꿈을 살던 남상교

 

 

우리 교구에는 배론이나 풍수원 외에도 오래전 박해를 피해 살던 교우촌, 순교자들이 살던 사적지가 여러 곳 있습니다. 이번 순교자 성월에는 원주교구에 있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신앙 유적지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1. 부론 서지마을 2. 강원감영 3. 백운 화당리(꽃댕이) 4. 학산 묘재

 

 

“시절이 차가워진 이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세한도(歲寒圖)에 적혀있는 논어의 한 구절이다.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나무로 귀양살이하는 집의 울타리를 두르는 것) 생활을 하던 김정희를 이상적(李尙迪)이라는 제자가 찾아오자, 혐한 세상이 닥쳤을 때 오히려 참된 친구를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로 적어 준 것이다. 험한 세상은 참된 친구만을 가려내는 것은 아니다. 아마 김정희는 스스로를 향하여서도 같은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부정한 세상 속에서 오히려 진실은 더 드러나고, 매서운 눈보라로 모든 것이 꺾이고 시든 뒤에도 자신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정희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남상교(아우구스티노, 1784~1866)는 그 김정희가 만난 세월보다 더 찬 세월을, 소나무와 잣나무보다 더 푸르게 물들이고 순교하였다. 그 푸른 꿈, 푸른 삶이 깃든 곳이 제천시 학산 묘재라는 마을이다.

 

원주와 제천의 경계 무렵에 있는 ‘묘재’는 산을 뜻하는 ‘뫼’와 고개를 뜻하는 ‘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산을 넘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충주의 산척(山尺)은 묘재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제천 백운의 화당리에서 태어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구 현풍 현감과 영덕의 영해 부사, 그리고 충주 목사(牧使)까지 지낸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시에는 첩첩산중이었을 묘재로 이사를 한 것은 순전히 신앙 때문이었다.

 

그 사정은 당시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제천에 머물렀던 리델(Ridel, 1830~1884) 신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핏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고장의 한 양반집에서 살고 있는데, 이 가문은 한때 나라의 일등 관직에 있다가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그 자리에 따르기 마련인 모든 미신들을 피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해야만 했다네. 또한 두 명의 전 관장으로부터 종종 방문을 받는데 그들 역시 같은 동기로 관직을 떠나와 지금은 가난과 궁핍의 생활을 하며 영혼을 구원받고자 하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다네. 이것이 우리 교우들의 운명일세.”라고 하였다.(리델문서, 1861년 11월 14일) 관직을 떠나 가난과 궁핍을 무릅쓰고 묘재로 이사 온 사정은, 결국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그 신앙의 푸르름을 간직하기 위해 찬 세월을 피해 묘재로 옮겨온 것이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가졌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1840년경, 현풍 현감으로 재직할 때 쓴 시에서는 “한 그루 소나무 … 굽은 줄기라 대들보와 기둥으로 쓰이지 못했으나, 천 칸 되는 큰 집 덮으려는 첫 마음 저버리지 않았네.”(屈幹未成樑棟用 初心不負庇千間 <瑜伽盤松>)라며 노래한 적이 있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이지만, 그 영혼은 오히려 천 칸 되는 큰 집,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은 것이다. 이 시와 비슷한 내용, 다짐은 남상교가 쓴 한글 가사 ‘경세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묘재에 살며 우리나라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당이 있던 배론을 자주 오갔던 듯하다. 아마도 미사에 참례하거나 성사를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렇게 묘재와 배론을 오갔던 길은 지금도 ‘성사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남상교는 인품도 뛰어나 그가 지난 고을에서는 청덕비(淸德碑)를 세우기도 하였고, 또 교리에도 능통하여 횡성에 사는 교우에게 교리를 가르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시로도 이름이 높아 당시 문인 홍한주(洪翰周)는 “요즘 신위(申緯)와 남상교는 모두 재기가 넘쳐나 시인의 절조이니, 정녕 이른바 시인의 시라 할 것이다.”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문화영성연구소에서는 남상교가 남긴 한시 593편을 번역, 현재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1866년 1월, 어지러운 정세로 순교를 예감한 양아들 남종삼(요한)이 묘재의 아버지를 찾아와 인사를 할 때 남상교는 “너는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형선고에 서명을 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천주교에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도록 명심해라.” 하며 순교를 앞둔 아들을 격려하였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388-389쪽)

 

이처럼 아들을 격려한 남종삼도 얼마 후인 1866년 3월 체포되어 제천읍에 갇혔다가 다시 공주로 끌려가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전언에 의하면 “남 아우구스티노는 이 고을 저 고을로 잡혀 다니다가 기진하여 죽었다고 하고, 죽은 후에 그의 서자 남한양이가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냈는데 그 목에 목매있던 자리가 있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한다. 아마도 굶은 상태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병인년치명사적」 권23)

 

순교의 순간, 그는 나팔소리를 듣고, 러펄러펄 일어나, 천 칸 되는 큰 집, 그 푸르른 나라를 보았을 것이다. 푸른 꿈이 서린 마을 묘재에서, 푸른 꿈을 품고 살던 남상교는 그렇게 푸른 나라를 만난 것이다.

 

[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원주주보 들빛 5면,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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