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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II: 갈릴레오 재판 사건 (14) 갈릴레오 사건에 관한 필자의 견해

49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3-07-31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14·끝) 갈릴레오 사건에 관한 필자의 견해


당시 교회는 권위 앞세웠고, 갈릴레오는 주장 증명하지 못했다

 

 

- 2018년 9월 28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학 연구 기관 중 하나인 이탈리아 카스텔 간돌포의 바티칸 천체관측국에서 예수회 밥 맥케 수사가 천체망원경을 보고 있다. 교회는 결코 과학에 무지하지 않으며, 지난 역사 동안 과학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CNS 자료사진

 

 

지금까지 갈릴레오 사건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 자체의 연대기적 흐름,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레오 사건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교회가 한 과학자의 과학적 견해를 권위로 억눌러 박해한 사건’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사건입니다. 1600년대 당시의 로마와 이탈리아를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과 함께 성경/신학에 대한 당시의 관점, 과학이라는 학문을 바라보는 당시의 관점 및 해석 방식의 차이 등까지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만 제대로 접근 가능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여러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연구 주제로서 탐구되고 있는 중이고, 동시에 과학자 집단과의 소통을 위해 교회 차원에서도 계속 예의주시해야만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필자가 그동안 정리한 내용은 갈릴레오 사건에 관해 표면적으로 확실히 드러난 일부의 내용만을 다루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향후 여러 학자들의 관심 주제로서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자리를 빌려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갈릴레오 사건은 (갈릴레오 본인과 교회 양측의 의도와 상관없이) 교회와 과학자 집단 간의 갈등을 촉발시켰고, 그 갈등은 - 교회에 비판적인 이들에 의해 부추겨진 측면이 강하지만 - 4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는 갈릴레오 사건에 관해 앞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면서 어떻게 과학자 집단과의 소통을 시도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교회에서 잘못한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미 교회는 ‘갈릴레오가 교회 교도권의 권위를 무시/손상시켰다’는 교회 중심적 해석을 사실상 폐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교회가 올바르게 대처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 해석에 관한 교회 교도권의 권위는 항상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성경 해석의 방식이 ‘문자적 해석’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미 가톨릭교회는 성경에 대한 적절한 역사 비평적 조사 방법을 긍정한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 이후로,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반포 이후로 성경에 관한 ‘문자적 해석’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현재까지도 그대로 고집한다면, 그 태도는 보수 개신교 측의 ‘창조 과학회’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되며 과학자 집단과의 대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가톨릭교회가 20세기 이래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있고,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학(특히 빅뱅 우주론과 진화론)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로 인해 이 성경 해석으로 인한 갈등은 더 이상 문제로서 표면화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400년 전에 교회 교도권이 가졌던 ‘세속적 결정권’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깨어 있었고 늦게나마 적절한 대응을 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9년 교황 즉위 직후부터 갈릴레오 사건과 관련한 조사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재조사하도록 했습니다. 1992년 10월 31일에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문을 통해 갈릴레오 사건이 “계몽 시기의 시작 때부터 그 사건들로 인해 생겨난 이미지가 진실과는 한참 떨어져 있던 일종의 신화”가 되었음을 지적했으며 신앙과 과학 양 진영 간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으로 인해 일어난 것임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제 필자 본인이 갈릴레오 사건과 관련해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갈릴레오의 제1차, 제2차 재판은 교회의 권위를 너무 앞세운 교회 측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이 점은 1992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신학자들의 “이해 부족”을 언급하며 이미 인정한 사안입니다. 하지만 갈릴레오 사건 전체에서 두 차례의 ‘종교 재판 그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진영 간의 긴장 상황들은 학문의 영역 안에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일방적으로 과학에 무지해서 일어난 일로서 단순히 폄하될 사안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교회 측에서 분명히 여러 경로를 통해 과학자들과 대중들에게 제대로 밝힐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당시의 교회는 결코 과학에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교회는 여러 ‘사제-과학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2000년 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과학을 잘 알고 가장 과학 발전에 주도적이었던 대단히 예외적인 시기였음을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력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를 보면 이 점은 명확해집니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갈릴레오 재판이라는 걸림돌을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만들었고, 계몽 시기를 지나면서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채 아직도 완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역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과 표명 이후 이제는 적극적으로 교회의 입장을 밝히고 다시 일어서야 할 때인 것입니다. 아울러 그동안 교회를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편협한 집단으로 격하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기존의 대중적 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임을 제대로 알리고 ‘탈신화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인 것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파괴된 독일 물리학의 재건에 큰 공로를 세운 탁월한 이론물리학자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1912~2007)가 이미 시도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갈릴레오가 결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교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기 르네상스 인간으로서 삶을 즐기고 향유하고자 했으며 과학과 과학적 명예를 향유하고 즐기려 했다. 또한 그는 충실하고 신실한 가톨릭신자로서 교회와의 충돌을 결코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 그는 교회를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두려워한다. 즉 그것은 그가 바로 중세의 진부함에 대항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과학적 진리를 옹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그가 주장한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당시의 교회는 이미 중세적인 교회가 아니었다.… 갈릴레오가 과학을 대표하는 데 있어서 약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의 주장을 전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재판소가 갈릴레오에 대해 그가 증명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 것 이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논쟁에서 광신자였다.”

 

[가톨릭신문, 2023년 7월 30일,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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