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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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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199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6-28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1. 최양업 신부의 부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님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 부모님의 순교 행적을 보고하였고, 박해 후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에 나타난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성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인은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이며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1801년 박해 후 가산의 부유함과 친척들의 번성으로 가족들이 냉담하게 되자, 1827년경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 2가 일대)에 거처하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성인은 세상 이야기는 도무지 듣기를 싫어하여 고개를 숙이고, 교리 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마음과 기쁜 빛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즉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나무라자,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에 있던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빚을 갚지 못한 이웃 사람이 돈을 꿔 준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자, 기꺼이 돈을 내주어 그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체포하러 온 포졸에게 아침밥을 지어 대접하고 남루한 차림의 포졸에게 옷을 내어 주자, 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리산 교우촌 40여 명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형제들이여, 힘을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갖고 우리의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포도청 감옥에 갇혔을 때, 옥살이하던 도둑이 형벌로 상한 데를 발로 찼으나, 성인은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성교(聖敎)하는 사람이라, 너희도 성교를 하려거든 프란치스코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대장이 예수님을 배반하라고 하자, “밥을 먹지 말라 하면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하나, 혹 가히 좇으려니와 배주(背主)는 만만코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포졸도 “최경환은 신통하다. 형벌 받을 때는 죽은 사람 같다가도 책을 보거나 교리를 말할 때에는 상처 아픈 생각도 없고, 죽기 무서운 마음도 없이 즐거운 빛만 드러난다.”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함께 갇혔던 교우들이 치도곤 10대를 맞고 배교하였습니다. 성인은 “수리산 모든 교우가 이렇게 다 배주하니 참혹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아무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오래도록 슬퍼하였습니다.

 

성인은 치도곤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옥사하게 되었는데,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고 하시면서 1839년 9월 12일 순교하였습니다.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2. 최양업 신부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

 

 

이성례(마리아)는 18세에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결혼하여 남편을 공경하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가고,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냈습니다. 평소에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습니다. 아들들이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칭얼거리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는 이야기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앙을 위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르쳤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1839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자식들을 위해 물건을 챙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이에 포졸 하나가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면서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왜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가기 싫은 것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당신은 누구를 망측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 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 말고, 당신 갈 길이나 가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청에 갇혔을 때, 예수님을 증거하느라 온갖 고문을 받아 살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져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 아기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는데 먹일 것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버텼습니다. 남편이 순교한 후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에 의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곤장과 칼에는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했습니다. 결국 모성애 때문에 배교하고 풀려났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신 모성애를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최양업이 유학 간 사실이 드러나서 형조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형조 감옥에 갇힌 신자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자고 권하였습니다. 이에 감동하여 뉘우친 후 배교를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모정에서 오는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막내아들 스테파노(2살)가 기아와 비참으로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때 두 아들(큰 아들 최양업과 막내아들 스테파노)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더 큰 믿음에서 살아남게 될 자식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순교의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둘째 아들 야고보(12살)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사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고아로 남겨질 아들들을 보면서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나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준비 안 된 모습을 보여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눈물짓는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드리고, 형장에 있어야 할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성례(마리아)는 1839년 12월 27일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당고개 형장에 도착했고,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먼 곳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는데, 동생들이 “어머니가 언제 오시냐?”라고 묻습니다. [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3. 스승들이 본 최양업 신부님 I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는 1836년 4월 4일 자 서한에서 “이들을 우리가 보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최양업과 최방제) 어렸을 때의 귓병으로 오른쪽 귀를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오는 겨울에 보내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들을 보낼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내면서 그해 12월 3일 자 서한에서 “이 소년들은(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랑탱 신부는 1837년 6월 13일 자 서한에서 “샤스탕 신부가 보낸 2명의 밀사들이 1837년 6월 7일, 3명의 조선인 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17세에서 18세까지의 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순박해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칼르리 신부는 1837년 10월 4일 자 서한에서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신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그것을 좀 고쳐볼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6일 자 서한에서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리브와 신부는 1839년 6월 23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아주 건강합니다. … 토마스는 천주 성삼의 제2위인 성자가,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제1위인 성부보다 덜 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들이 어떤 것이든 소죄를 고하지 않는 사람은 통회가 없고 따라서 그러한 상태에서 사죄를 받으면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죄만은 모두 고해야 하지만 소죄를 고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 8월 11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하느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선교지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842년 4월 1일 자 서한에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남은 조선 학생(최양업)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을 발견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브뤼니애르 신부는 1842년 10월 22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에 대해 “신심과 재능이 뛰어난 저의 조선인 젊은 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는 1843년 2월 20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는 북쪽에서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계속하며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살만 더 먹었더라면 금년에 서품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리브와 신부는 1843년 6월에 보낸 서한에서 “아직 성품을 받지 않았다면 곧 받게 될 것이고,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인 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4. 스승들이 본 최양업 신부님 II

 

 

매스트르 신부는 1844년 12월 1일 자 서한에서 “작은 시계는 움직이고 있으며 나머지 두 개는 수리가 가능합니다. 그것들을 이리로 돌려보내지 마십시오. 좋은 것 하나는 최양업 토마스가 성직을 시작할 때 그에게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는 1857년 10월 2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가 한 번은 외교인들에게 잡힐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는 매우 다행히도 그가 있던 집 울타리에 나 있던 구멍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859년 10월 1일 자 서한에서 “우리 조선인 (최양업) 신부는 급습을 당하고 잡힐 뻔하였습니다. 그의 교우들은 괴롭힘을 당하고 매를 맞고 옷이 찢겼습니다. 신부 자신도 모욕을 당하고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의 가방을 열거나 그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였습니다. 관장은 그가 선교사이거나 아니면 천주교의 한 두목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이러한 확신에서 그 관장은 그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아전들이 잡으려 하던 우리 신부를 늘 멀리하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페롱 신부는 1861년 7월 26일 자 서한에서 “올해는 매우 괴로운 심정으로 서한을 올립니다. 우리는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 제일 귀중한, 또 (르그레즈와) 신부님께서도 당연하게 매우 사랑하신 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신부는 (경상도 남부지방) 공소 순방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님한테로 가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티푸스에 걸려 며칠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매우 다행하게도 그는 (배론) 신학교에서 약 120리(4km)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푸르티에 신부는 통지를 받고 그에게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 주고 병자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낼 만큼은 아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일에 종사할 만큼 이 (조선)말을 잘 아는 다블뤼 주교는 그를 잃음으로써 그의 오른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 토마스 신부는 제게 어떤 동료 신부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도착한 때부터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 그를 존경하는 만큼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는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서로 방문하고 대개는 함께 피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잃음으로써 매우 훌륭하고 충실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착하신 하느님은 우리 불쌍한 조선을 좀 가혹하게 취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선에 새 선교사가 오면 하느님은 즉시 우리 중에서 순진한 사람을 데려가십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매스트르 신부가 (1857년 12월 20일) 돌아가셨습니다. 올해는 더 귀중한 사람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눈물에 젖지 않을 수 있습니까? ……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신부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2021년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5. 스승들이 본 최양업 신부님 III

 

 

페롱 신부는 1861년 7월 26일 자 서한에서 “실제로 지난해(1860년)의 소요(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31km) 내지 100리(40km)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그가 나홀 밤 동안 계속해서 과중한 일을 하고 나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정도였습니다.”라고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8월 4일 자 서한에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길고 험한 공소 방문이 끝날 무렵(1861년) 6월 15일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교우들을 매우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애도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신부의 지식과 그의 강론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될 때, 그들의 슬픔은 더욱 커질 것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배론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푸르티에 신부는 1861년 11월 2일 자 서한에서 “그는 중병에 걸려 저의 산(배론)에서 170리(66.8km) 떨어진 어떤 교우 집에 간신히 도착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저는 즉시 달려갔고, 그가 운명하기 8-9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이때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그의 장례 준비로 매우 바쁩니다. 장례식은 며칠 후(11월 초)의 저의 산의 한 작은 언덕에서 거행될 예정인데, 주교님이 오실 것이고, 두 동료 신부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이리하여 나의 오두막집이 큰 모임의 장소가 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861년 10월 10일 자 서한에서 “그는 알려진 대로 열성적으로 오랫동안의 교우촌 사목 순방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노력을 풍부한 열매로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오기를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우리한테 오는 중에 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동료 하나가 그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에게 성사를 줄 시간만 겨우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돌려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소식이며 여기저기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선을 행하기 위해 그가 지녔던 보기 드문 덕성, 지칠 줄 모르는 열성, 재능, 능력 등등 선교지가 그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줍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는 모두에게 애석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당장에는 아무것도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1861년 9월 4일 자 서한에서 “우리의 유일한 현지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의, 그리고 대단히 값진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최 신부가 구원의 열매가 풍성했던 성무 집행 이후 자신의 성과를 보고하러 수도로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선한 신부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기별을 제일 먼저 받은 푸르티에 신부가 일찍 도착하여 최 신부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 신부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단 두 마디만이 그의 생기 없는 입술에서 새어 나왔는데, 그것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그는 몇 해 동안의 학업만으로 라틴어를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슬퍼하였습니다. [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6. 최양업 신부의 영성

 

 

[성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굳은 믿음입니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마음이 달려 있고,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더욱 강하고 더욱 감미롭게 인도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1859.10.12) 하였습니다. 고군산도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했을 때,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도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라고(1847.09.30)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교회의 소식을 전하여 “우리는 만사에 항상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라고(1858.10.03) 하였습니다. 섭리에 대한 그의 인식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 홍콩에서 “그 밖에 (소원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입니다.”라고(1847.04.20)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건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1846,12.22)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코린 2,2)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해로 인해 복음의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짝 말라버린 우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 주소서.”라고(1851.10.15)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순교자들과 박해의 고초를 겪고 있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철저히 따르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순교자들을 ‘그리스도의 용사들’이라고 불렀으며, 박해로 인해 감옥에 갇힌 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사람들’이라고(1844.5.19.; 1856.9.13)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일치를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 성령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데, 그러한 사실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적었던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삶 안에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은총과 도우심의 은총이 필요하며, 성령의 내적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우리는 모두 웬만큼 건강하고 제법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불쌍한 우리 신자들이 한시름 놓았습니다.”라고(1855.10.08)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많은 은총 안에서 순수하고도 깊은 영적 기쁨을 느끼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제주도에 복음이 전파된 소식을 전하며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라고(1858.10.4) 하였습니다. 그가 박해의 곤경 속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진실한 기쁨과 보람, 희망의 삶은 바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1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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